85세김여사님과 호암 미술관에 가다 7월달에 여기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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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เผยแพร่เมื่อ 25 ธ.ค. 2024
- #여인들과항아리 #20세기한국미술을대표하는화가 한국의 산천과하늘 달과구름 백자와전통무늬등 매우 한국적인 소재를가지고 점점 추상화시켰다
점,선,면으로 이를 나타내는
#점면점화 를 그렸다
#132억원짜리그림
#추상미술
#호암미술관
#국내작품최고가
#김환기
1931년 19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로 밀항하여 긴조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1년만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4월에 다시 도쿄의 니혼대학 예술과 미술부에 입학하였고, 전위를 표방하는 미술단체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참여한다. 후지타 츠구하루의 주도하에 길진섭, 김병기와 함께 활동하였다. 여기서 같이 다니던 길진섭, 다시카미 다케나, 간노 유이코, 후나코시 미에코와 함께 '백만회'를 조직했다. 도쿄의 화랑에서 단체전 4번, 개인전 1번을 하고 1937년 연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한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 미술대 교수를 역임한 김환기는 1947년 유영국·이규상과 함께 신사실파라는 미술단체를 결성, 52년에는 홍익대 미술대 교수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5 ~ 44살 동안 5번의 전시회를 하다가, 1956년 44세의 나이에 파리에서 예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프랑스 파리와 니스 그리고 벨기에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프랑스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 이후 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1959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다시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명예상을 수상했다.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뉴욕으로 건너가 11년간 록펠러 3세가 설립한 아시아 소사이어티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뉴욕에 정착한다. 여기서 김환기의 대표작인 전면점화가 탄생하였다. 그러던 중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그 유명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을 출품하고 대상을 받기도 했다.
1974년 7월 7일에 뇌출혈로 갑작스레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여 12일 오후 1시에 수술을 받았다. 7월 25일 뉴욕주 포트체스터(port chester)에 있는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오전 9시 40분에 사망했다. 평소에 즐겨 다니던 뉴욕주 발할라(Vahalla) 산마루의 켄시코(Kensico) 묘지에 안장되었다. 조각가 한용진이 묘비를 세우고 서예가 김응현이 글씨를 썼다. 향년 61세.
김환기의 공적을 기려 1978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