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역사 프로그램이 왜 사라졌을까요? 다시 이런 역사를 밝히는 프로그램이 개편될수 있도록 많이 알립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이렇게 방송으로 또 다른 기록들이 남을 수 있도록 또한 일제시대 날조된 한국의 역사를 바로 찾을 수 있도록 국민들의 관심과 행동으로 나서야 합니다~~
60년대 70년대 허리를 졸라맨 한반도 산업화 대역사시기에 땅을 파면 출토되는 유물을 감당하는건 공사를 막는 크나큰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눈물을 삼키며 공사를 진행한게 한두번이 아닌데 상당유물이 이렇게 건재한걸 직접 목격하니 안도감도 오네요. 이런 좋은 프로가 요즘은 못만든다는건 아쉽네요.
어쩌면, 천여개의 무덤을 조성한 것은 하늘에 감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그 무덤조성의 모양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 신라 무덤의 발굴 시 갑자기 천둥번개 치고 비가 세차게 쏟아졌었다는 발굴자의 증언이 있는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도 피장자의 어떤 요소가(그의 몸의 요소, 그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의 요소, 그곳에 마음을 묻은 약 2천년전 어떤이들의 요소) 하늘과의 감응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동해안오징어 다큐에서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로 내렸다는 그 노 고고학자의 증언은 기억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보다 강화된 것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이라면 이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신묘한 힘과의 감응이라 얘기하고, 현대인들은 어떤 화학적 작용이라 얘기하는 것의 어떤 것 아닐까요? 고대에는 그것의 원리를 어떤 식으로든 이용한 그룹이 지배그룹이 되었을테고요. 저는 청동거울의 쓰임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지배그룹(지배자의 후손들이 불어나면서 여러 곳으로 떠나야 했던 이들)이 자신들의 소통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일종의 개인 봉화대 같은 것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 다큐를 보고 나니 백제는 (하얀피부의)제나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더욱 드네요. 그리고 대가야의 사람들도 부여계 사람들이고 고구려와도 백제와도 신라와도 연관이 있었지만, 시기에 따라 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구려와 원수가 되고, 백제와 원수가 되고, 신라와 원수가 됨으로써 결국 지배층은(남자들 위주) 떠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토속인이었던 여성들은 땅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전사로도 활약했지만 결국 다들 죽고.
@@lilcantabile444 고대에는 별자리 관찰이 중요한 일이었고, 청동기의 무덤에도 별자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요즘 유튜브에 있는카오스 강연의 물리와 화학을 듣고 있는데, 생각이 좀 더 진전되었습니다. 공부의 폭이 넓어지면 가정이 상상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기원전후 한반도와 고조선 그리고 청동기 시대에 대해 구체적 연결이 많이 진전된 것 같더군요. 백제와 가야, 신라에 대해서도요.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숭실대에 있는 세문청동거울은 원래 그런 본이 없었다면 만들어 볼 엄두도 못냈고, 본을 가지고 만들어도 손기술로는 만들 수가 없더군요. 그 본을 만드는 것은 기계전사로 문양을 찍고, 화학물질에 담구어 홈이 부식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요. 청동기 그들은 우리가 고대사람이라 폄하하는 것보다 훨씬 고도의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높은 곳의 대기 중에 있는 어떤 것에 감응하는 방법을 알았을 수도 있고, 가야의 무덤처럼 산덩성이에 시신을 어떤 간격 어떤 모양으로 배치함으로써 하늘의 별자리와 감응을 시도할 수도 있었겠죠.
얼핏 우리나라에는 어떤 이유로 합리주의가 정착할수 없었다고 단언한 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가야는 그당시 산업화에 필요한 많은 요소를 갖췄고 합리적인 무역과 외교를 잘 수행했지만 북방과는 그렇지 않았든 모양이다. 가야의 멸망이 요즘 떠오르는 저출산과는 관계가 없을지? 인해전술로 몰려올 북방군들에 그당시로는 초현대식 철갑기병까지 갖췄지만 저출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여전사 까지 동원해야 했으니 하는 말이다.
외세를 끌어드린 백제는 가야와 일본과 손잡고 한민족 신라를 공격하다 하지만 금관가야 출신 김무력의 무력에 의해 초토화되고 가야전체가 신라에 병합 결혼 동맹해놓고 몰래 뒤통수칠 생각한 백제의 성왕의 말로 최후 고구려 밀어내고 한강 먹었으면 그냥있지 신라한테 더 진격안한다고 불만 고구려 무서워 한강방어 신라한테 맞겨놓고 배신 덤탱이 씌우고 그 명분으로 관산성 (이릉대전급) 일으키다 김(구)해의 금관가야가 대단하긴 하네 3째아들 무력이 그의 손자 유신이까지 대단한 신라야 이사부 사다함 선덕 진덕 여왕들까지 그와중에 내분의 적 비담까지 압살하고 고구려 백제는 개소문과 그의 아들 3인 방귀와 예식진한테 말아처먹지ㅉㅉ 최약체 경상도 신라가 드라마틱하다 그러고보면 경상도지역이 인재가 많아 신라+가야 고구려는 중국과 북한이고 백제는 서울 경기 인천 강원 충청도 전라도 6도를 가지고도 2도를 가진 신라한테 개처망했네 ㅋㅋ관산성전투는 진짜 삼국지 이릉대전급이다
김해김가.가 말 합니다. 틀린것은 마지막생. 잘못. 신화가 좋을까? 장수 했는대 왜 지금은 단명 할까? 간신의 세상이... 도 딲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대. (장수) 간신말에 속아온 세월이 한참... 김수로왕님 체질 정치를 했기에 건강하고 장수 했다. 팔.체질. 중 태양인2 가 잎채소 와 바다생선 을 먹어면 건강하고 장수도 한다 간신은 골루골루 먹어야 좋타고 .... 먹엇다 병걸리고 단명 했다 골루골루 가? 잎채소 와 바다생선 외 뿌리채소 와 육고기 를 먹어니 병걸리고 단명
@@고구려백제중국사들전 ㅋㅋㅋ 다만 본디 마한의 맹주국은 기원전 190년경에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세력이 건국한,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었던 건마국이었다. [3] 하지만 기원후 3세기의 시점에서는 주도권을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청당동에 자리잡은 걸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삼한 전체의 명목상 영도국이었던 목지국에게 빼앗긴 상태. 그러나 전라도의 다른 마한 거수국들이 전부 목지국의 직접 지배 아래 혹은 훗날 백제가 주도했던 간접 지배 단계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목지국의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는 없으되 훗날 등장하는 백제에 비하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마한이라는 연맹체에는 크게 보아 한강~임진강 유역권, 안성천 일대, 금강 유역권, 영산강 유역권, 섬진강 유역권 등 다섯 유역권으로 분류해 볼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목지국만 못 했던 걸로 추정되지만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 역시 나름 세력이 있었기에 그 지역들에는 그렇게까지 크게 미치진 못 했던 걸로 보인다. 섬진강 유역권은 세력은 미약하였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 백제에게 소멸된 이후에는 백제가 목지국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꽤 지향점이 다른 고대 국가였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세기~5세기까지, 영산강 유역은 고유의 묘제가 6세기까지도 유지된다.[4]# 다만 침미다례임이 유력한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후기 마한 연맹체를 이끈 바 없으며, 굳이 후기 마한 연맹체의 영도국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국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왜계 전방후원분(초기 횡혈식 석실분)[5] 또는 가야 세력의 유물이 전라남도 일대에서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백제의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 수록 침투해가면서 영산강 유역 세력의 타지 진출을 제한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마한이 백제에 편입되는 과정은 목지국을 대신해서 맹주국이 된 백제가 다른 마한 소속 연맹 국가들을 중앙 집권체제로 편입해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6]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바탕으로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근초고왕이 마한, 즉 전라도 남해안 일대까지 모두 정복했다는 학설은 문제가 있는 학설이었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 자체가 왜(倭)의 한반도 정벌이라는 황당무계한 내용에 여기에는 또 왜(倭)의 신라, 가야 정벌 기록도 있는데 신라, 가야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외면하고 굳이 침미다례만 콕 집어 마한 전체를 정벌했다고 해석했던 게 그것. 다만 지명의 비정이나, 근초고왕 이후 고고학적으로 금강 유역권 일대의 성장이 억제되는 점, 그리고 백제가 대방군(현 황해도 일대)의 옛 교역 루트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가 오늘날의 광주전남 서부 일대 영산강 유역의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되는 신미-침미다례를 지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옛 목지국 수준의 위상을 영산강 유역 세력권에까지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건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7] 이러한 설은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이론으로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 2000년대 후반에 충청남역사문화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의 웅진백제 편에서 삼국사기까지도 고려하여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475년 백제가 한성 함락이란 초유의 사태를 거치면서, 이 시기를 전후해서 금강 일대 세력이 성장한다. 당연히 이 시기에 영산강 유역 세력은 독자성이 더 강해지며[8] 그래도 거리가 보다 가까운 금강 유역 세력은 적어도 4세기 후반 ~ 5세기 초반까진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보다 더 세력이 강한 영산강 유역은 시간이 더 걸렸다. 국보 제295호 나주 금동관이 보여주듯 6세기 초중반에는 오히려 더 큰 성세를 자랑하게 된다. 이 세력은 독자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행했던 데다 웅진백제가 주도하는 대고구려 연합전에 초반에는 오히려 대가야보다도 시큰둥한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백제를 크게 긴장시킨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이 시기에 신라, 대가야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큐슈 일대와 교역을 강화하며 힘을 키운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날 정도. 거꾸로 이 시기 대가야의 경우 신라보다는 백제 쪽으로 문화나 경제적, 군사적 의존도가 기울어지는 경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한성 함락으로 밀려나 현재의 충북 지역까지 털리던 백제가 갑자기 무령왕릉 시기 고구려까지 쳐들어간 배경에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지원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 또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에 영산강 일대를 백제 체제에 편입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된다. 영산강 유역은 거리도 멀고 원래부터 부강한 곳이었기에, 백제의 영향력 투사 혹은 연합이 가장 마지막에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한편 호남 동부 섬진강 유역 일대는 그 시대 기술로는 평지가 적고 물살도 좁고 빨라 큰 공동체가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때문에 영산강 유역과는 달리 공동체들이 죄다 따로 노는 분위기로 해석된다. 다만 또 다른 의문은 바로 가까운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이곳에 전혀 진출하지 못한 것인데, 유력한 추측은 백제국의 견제 밖엔 없다. 백제국에게 막 맹주 자리를 빼앗긴 목지국이 여전히 망하지 않은채 백제국에게 직간접적으로 열심히 반항하며, 한편 마한 신미국이란 명칭으로 대외에 자칭하면서[9] 백제국의 마한 대표 자격에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이의를 제기하던 4세기 초에, 오히려 가야가 섬진강 유역과 활발한 교역을 추진하게 된다. 때문에 현재 전북 지역인 남원시, 장수군, 구례군이나 순천시, 여수시 같은 섬진강 유역 지자체는 가야 계통 유물과 고분들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고대 국가 형성기에 철기문화의 모태 지역으로 철기 유적이 밀집된 현재의 전북 지역은 마한과 가야 문화의 공존과 융화된 모습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이로부터 가야의 국력이 확장하는 계기가 된 지역으로# 이들 지자체에서도 가야사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10]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 백제에게 소멸된 이후에는 백제가 목지국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꽤 지향점이 다른 고대 국가였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세기~5세기까지, 영산강 유역은 고유의 묘제가 6세기까지도 유지된다.[4]# 다만 침미다례임이 유력한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후기 마한 연맹체를 이끈 바 없으며, 굳이 후기 마한 연맹체의 영도국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국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왜계 전방후원분(초기 횡혈식 석실분)[5] 또는 가야 세력의 유물이 전라남도 일대에서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백제의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 수록 침투해가면서 영산강 유역 세력의 타지 진출을 제한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마한이 백제에 편입되는 과정은 목지국을 대신해서 맹주국이 된 백제가 다른 마한 소속 연맹 국가들을 중앙 집권체제로 편입해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6] 그러나 475년 백제가 한성 함락이란 초유의 사태를 거치면서, 이 시기를 전후해서 금강 일대 세력이 성장한다. 당연히 이 시기에 영산강 유역 세력은 독자성이 더 강해지며[8] 그래도 거리가 보다 가까운 금강 유역 세력은 적어도 4세기 후반 ~ 5세기 초반까진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보다 더 세력이 강한 영산강 유역은 시간이 더 걸렸다. 국보 제295호 나주 금동관이 보여주듯 6세기 초중반에는 오히려 더 큰 성세를 자랑하게 된다. 이 세력은 독자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행했던 데다 웅진백제가 주도하는 대고구려 연합전에 초반에는 오히려 대가야보다도 시큰둥한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백제를 크게 긴장시킨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이 시기에 신라, 대가야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큐슈 일대와 교역을 강화하며 힘을 키운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날 정도. 거꾸로 이 시기 대가야의 경우 신라보다는 백제 쪽으로 문화나 경제적, 군사적 의존도가 기울어지는 경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한성 함락으로 밀려나 현재의 충북 지역까지 털리던 백제가 갑자기 무령왕릉 시기 고구려까지 쳐들어간 배경에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지원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 또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에 영산강 일대를 백제 체제에 편입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된다. 영산강 유역은 거리도 멀고 원래부터 부강한 곳이었기에, 백제의 영향력 투사 혹은 연합이 가장 마지막에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한편 호남 동부 섬진강 유역 일대는 그 시대 기술로는 평지가 적고 물살도 좁고 빨라 큰 공동체가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때문에 영산강 유역과는 달리 공동체들이 죄다 따로 노는 분위기로 해석된다. 다만 또 다른 의문은 바로 가까운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이곳에 전혀 진출하지 못한 것인데, 유력한 추측은 백제국의 견제 밖엔 없다. 백제국에게 막 맹주 자리를 빼앗긴 목지국이 여전히 망하지 않은채 백제국에게 직간접적으로 열심히 반항하며, 한편 마한 신미국이란 명칭으로 대외에 자칭하면서[9] 백제국의 마한 대표 자격에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이의를 제기하던 4세기 초에, 오히려 가야가 섬진강 유역과 활발한 교역을 추진하게 된다. 때문에 현재 전북 지역인 남원시, 장수군, 구례군이나 순천시, 여수시 같은 섬진강 유역 지자체는 가야 계통 유물과 고분들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고대 국가 형성기에 철기문화의 모태 지역으로 철기 유적이 밀집된 현재의 전북 지역은 마한과 가야 문화의 공존과 융화된 모습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이로부터 가야의 국력이 확장하는 계기가 된 지역으로# 이들 지자체에서도 가야사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10]
출처 namu.wiki/w/전라도#s-2.1 ㄹㅇ 킹무위키 + 천관우의 위치 비정에 따르면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19개 국이 전라도 지역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노령산맥 이북의 마한 소국들은 1세기 무렵에 백제 온조왕과 다루왕에게 통합되고, 노령산맥 이남에 남아있던 마한세력은 백제의 영향 아래 침미다례라는 연맹을 형성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백제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가야가 순천, 여수 등지를 침략하고, 남원 일대에 기문 지방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후에 국력을 회복한 백제가 침미다례를 탈환하고 가야세력을 축출하여 전라도의 마한 세력은 완전히 백제에 통합되었다. 백제는 지방행정단위인 5방(方)중에 현재의 전라북도 지역에 고부군을 치소로 중방(中方), 전라남도 지역에 장성을 중심으로 남방(南方)을 설치하였다. 백제 무왕이 익산을 천도지로 선정하고 미륵사를 창건했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영토에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설치되고, 현 전라도 지방에 6개 주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으로 인해 웅진도독부의 행정 구역은 제구실를 못했으며,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무시하고 지금의 나주를 치소로 발라주(發羅州)를 설치하였다. 당나라 세력을 몰아낸 신라는 685년 경에 전국을 9주로 정비하면서 발라주의 치소를 지금의 광주로 이전하면서 무진주로 개칭하고, 전북지역에는 완산주가 설치되었다. 완산주에는 10개의 군, 31개의 현, 그리고 남원경이 설치되었며, 무진주에는 14개의 군, 44개의 현이 있었다. 757년에는 완산주를 전주(全州), 무진주를 무주(武州)로 고쳤다.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신라가 내분 등으로 혼란에 빠지자 각지에서는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는데 892년에 견훤이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성장하여 완산주(지금의 전주시)를 석권,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3년에는 나주를 중심으로 서남부 해안 지방을 왕건이 손에 넣어 후고구려의 영토로 삼기도 했다. 936년에 고려에 의해 후백제가 멸망하고 현 전라도 지방은 고려에 통합됐다.
@@남진혁-v6s 님 애쓰지 마셔요ㅋㅋ 저 분은 역사적 사실이나 그런거 관심 없어요 저도 첨엔 님처럼 찾아가며 논리적 반박해봤는데 소용없음 저 분의 주장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녜요 저 분은 역사를 도구로 자신의 정치성향을 보이는 중이라ㅋㅋ 특정지역을 혐오하고 결국 갈라치기하는걸 목표로 하는 사람임 님께서 열시미 찾아서 떠먹여줘도 절대 인정 안해요 저 분의 역사적논쟁 하는게 아니라 여기서 정치질 하는거라 같은 주제를 이야기 하는것 같아도 저 사람 답은 정해져 있고 말하고자 하는것은 정해져 있어서 결국은 다른 이야기하는거임ㅋㅋㅋ 자기가 밀리면 교묘히 주제 돌리면서 피함 상대하실 필요 없어요 시간과 정신에 해로움
명복을 빕니다 ❤🎉 동행하는 차문화/철수 김원태 시인 흐트러져 흐물흐물 공중에뜬 마음들에 달달함을 침투시켜 활기참을 넣어본다 본래 맛을 아양으로 변모를한 살가운 맛이다 쩍쩍하고 달라붙는 부드러운 맛이다 시작하는 정서들을 다독이며 만져주며 살맛 나게 발자국을 떼게 하는 너는야 마법사이로다 온몸을 훑어서 내려가며 주물고 만지작거리며 깎고 다듬어 살포시 갈 길 간다 나의 입이 한말을 기억한다 간단하고 속성인 자판기 커피가 좋아라, 잠을 깨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차 문화의 커피타임 활기차게 내 정서에 찾아든다.
성남시장 이재명 두산건설 임원 만나다 아베 노부유키 1945년 조선총독부의 수자입니다 대한민국 식민사학의 계繼 보保 자者놈들... 제1세대 이병도 신석호 손진태 제2세대 김철준(전 서울대 교수) 제3세대 노태돈(서울대) 이기동(동국대) 주보돈(경북대) 잊지말라 한국 🇰🇷 역사왜곡 🇰🇷 바로 세우는 혁명입니다 고)박원순 역사왜곡 남발자 이하 대한민국 🇰🇷 주적입니다
ㅋㅋㅋ 그래서 님은 역사를 논하는데 신뢰를 못주는거예요 역사 논하는데 자신의 정치성향에 끼워 맞추려다보니 사실은 비틀고 왜곡하고 한쪽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님이 뭔가는 많이 아는것 같아도 결국 이 정보 저 정보로 정치적인 입장 대변하게 될 뿐임.. 그래서 첨엔 님하고 열시미 논쟁이란걸 하다가 이제 님하고 역사 논쟁 안하게 됐죠 님의 모든 근거와 주장은 역사논쟁이 아닌게 뻔하니까 그저 님은 저를 비롯한 다른 많은 분들의 조롱의 대상이자 밈의 대상이 된거죠^^ 님이 저랑 극단적으로 갈리는 주장을 하셨더라도 만약 역사적 논쟁을 했다면 전 절대 님을 조롱하거나 ㅂㅅ취급 안했음 최소한의 님의 의견을 존중은 했음 제가 모르는 사실에 대해 공부도 했을거고.. 그런데 님은 정치이야기중 그것도 매우 편향적으로 특정세력을 혐오하는 방향으로 매우 못된 방식의 정치질을 하고 계심 그래서 전 님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저 개소리일뿐..^^ 그럼 또 개소리 하셔요~ 전 이만~
대가야가 멸망하기전,마지막왕 이름마저 월광 뜻달빛이라니 넘이쁘고아련하다
아아.. 정말 요즘은 왜 이런프로그램이 없는지요. ㅠㅠㅠ
해외여행을 생각하다가….
작년에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서 70 평생 처음
혼자 여행을 계획하는데…
이런 프로가 정말 재미있고 큰도움이됩니다. 감사합니다🎉
역사스페셜 너무 그리운 프로. 이런 걸 만드신다면 수수료가 지금처럼 아깝지는 않죠.
꾸벅꾸벅 졸면서 알뜰히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서울로만 가지만 합천 고령 김해 등 깊디깊은 스토리와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고장.
풍경만 아름답겄지 사람은? 사람도 아름다울까? 두환이에게 절하던 그 개잦같은 것들이 바글바글하지 아직도? 아직도 살인귀를 그리워하는 버러지 바글바글하는데,,,
왜 요즘엔 이렇게 좋은 프로가안나오나요 자상한설명 성우목소리도 신뢰가가고 김종진의 땅의역사라든가 제발 볼만한 프로 만들어주세요
가야,그리운 우리의 역사
제대로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가야고분을 보고 참으로 놀라왔어요.
역사스페셜 너무 좋앙...🥰
역사 서페셜 감사하니다 !
역사학자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
해설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
대한 민국 화이팅 ! 🎉🎉🎉🎉
우리에 역사가 재미 있었요 늘 이런프로 그래
우리에 역사가 살아온.
역사 요😊
이런 프로그램은 꼭 필요한것인데ᆢ 왜 연애인들 상업성에만 치중하는지 ᆢ 요즈음 tv안 봐요ᆢᆢ ㅠㅠ
역사스페셜과 같은 프로그램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TV만 켜면 그넘의 예능 예능~
너무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이런 역사 프로그램이 왜 사라졌을까요?
다시 이런 역사를 밝히는 프로그램이 개편될수 있도록 많이 알립시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이렇게 방송으로 또 다른 기록들이 남을 수 있도록 또한 일제시대 날조된 한국의 역사를 바로 찾을 수 있도록 국민들의 관심과 행동으로 나서야 합니다~~
중국정부에서 이 프로 아주 안좋아햇다고함.. 친중정권 들어서며 폐지수순
이런 역사 스페셜 방송은 늘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가야는 흩어져 있어서 힘을 못쓰고 신라에 흡수 된거 아닌가 싶으네요.
오늘 또 시청했습니다. 우리 역사 가야에 대해 이름만 외우고 있었는데 더 알게 되었습니다.
윗분말씀대로 다시 계속해서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요즘 유튜브는 볼만한게없음 역사스페셜다시보니 겁나재밋네!!!
참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진짜 수신료의 가치를 하던 방송. 아직도 방대한 사료가 번역할 인재가 없어서 보관 혹은 방치되고 있는 실정...😢
결국은 예산이 문제죠. 하다못해 고전번역원에서 A.I.라도 만들 수 있는 예산만 된다면...
@@BlackSkyUploadTube썩녈이가 지 술 처먹느라 다 깍잔아요. 거니 명품백 사줘야 해서. 지 딸랑이들 챙겨줘야 하고
@@BlackSkyUploadTube연변에 조선족들을 동원하면 몇달새에 해결될 일
역사스페셜.이프로그램.다시부활시킬수는없나요?
부활했어요 다른 형식으로
돈이 벌려야 부활을 하지ㅋ
@@vimanchin 맞아요 ^^
구점 오팔초 일백m 세계적인 🌐 우샤인 볼트 💘
대한민국 👄 🇰🇷부정선거 수사하라 👄
🇰🇷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반드시 성공하라 ☀
윤석열 대통령 취임후 재개될 껍니다
역사왜곡 남발자들 제거후 바로 세웁시다
더 이상 나올만한 소재가 없음
기존 소재를 재탕 하더라도
대단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새로 추가할만한 내용도 없고
다른 시각으로 보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건
역사저널 그날에서 이미 다 했음
너무잘보고있어요
TV를 켜면 유재석 신동엽 서장훈 김구라 김성주 강호동 박나래 김숙 송은희등등 몇명이 프로그램전체를 장악해 다양성이라고는 찾아 볼수없는 시대에 이런 단비같은 프로그램이 꼭 필요하다
갑자기요?
갠적으로 젤 보기싫은 인간들임
그얼굴이 그얼굴..지친다.
그 사람들은 종편으로 가야하고 공영방송은 국민에게 송출비용을 받는 만큼 돈을보고 프로그램을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
지겹다
이때는 진짜 수신료가 아깝지가 않았다
맞는말씀임니다. 지금 그날 패널보면 쓰레기같은작가도나오고 이젠 중국보다더한 왜곡이 걱정되네요
'고령읍'은 2015.4.2에 '대가야읍'으로 명칭이 변경됐답니다.
대가야군 대가야읍...
웅장해지네요.
고령군 대가야 읍 입니다.
찬란한 문화도 그것을 지킬수있는 강한 군대가없다면 사상누각일뿐이다.
오늘과 다르지않다.
꿀잠 자게 해줘서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 😄
방송사가 연얘프로그램을 되도록 많이 편성하는이유가 방송사 pd들 기타 관계자들 비자금 문제와도 직결된다네요 정말큰일이여
백제의 배신으로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게되고, 이 결혼으로 월광태자가 탄생하게 되고, 우륵이 망명하게 되며, 이 월광태자가 정치적인 혼란을 피해서 월광사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이 되네요.
힘차게
[청정심 박치우]
"한겨레역사힘차게"
: 자주적 한겨레 역사관 , 한겨레의 역사 외 세계사 포함 , 국수주의 배격 ,
동서양 사상과 문화
역사는 겨레의 정신이다
바른 정신을 가져야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처럼
바른 역사를 가져야 겨레가 바르게 살아간다
방송이 너무 오락 위주로만 가지않고 공영방송으로서 이런 방송들을 지켰어야 되지 않나?
거대한 고분군을보면
신라 대릉을 넘가하는
규모로 볼때 대가야가
얼마나 강력한 세력인가를
말해준다
한반도는 삼국이 아니고
사국의 시대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은 사기다
삼국은 3국이 맞아요. 일단 가야는 고대국가가 되지 못함...
가야에역사는어디로가야.......
@@권현-e7y 한반도내 삼한의 역사는 맞지만 중앙 집권에는 실패해서.. 고조선 멸망이후 열국시대~삼국시대 초기까지 존재했던 연맹국가라고 보면 될듯요.
백제한테 뒤통수 맞아서 신라랑 혼인동맹 했는데 다시 신라한테 배신당하는 거 개불쌍하네 ㅋㅋ
오 가야! 가야산!😮😮😮😮
3:44 제가 역사스페셜 책 가지고 있는데 그 책에서 국사단 내부의 그림의 주인공이 누군지 분명치 않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아마도 월광태자 아닐까요..
도설지가 한자로 상이하게 표시되는 이유를 알았네요. 도道+口설設지指(단양 신라적성비) 또는 都設智(창녕 진흥왕순수비(척경비)
60년대 70년대 허리를 졸라맨 한반도 산업화 대역사시기에 땅을 파면 출토되는 유물을 감당하는건 공사를 막는 크나큰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눈물을 삼키며 공사를 진행한게 한두번이 아닌데 상당유물이 이렇게 건재한걸 직접 목격하니 안도감도 오네요. 이런 좋은 프로가 요즘은 못만든다는건 아쉽네요.
역사저널 그날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요하 혹은 홍산문화는 안 다루나요?
봄이 오면 대가야로가자…
선조들의 깊은 불심으로 현재 불교가 살아있어서 다행인가합니다
선조들에 감사 올립니다
나는이땅에 살게된것을
감사올립니다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대가야 배웁니다.^^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금관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이렇게 6가야로 알고있음
전기 .후기로 나누어 봐야합니다
저는가야인입(김유신장군집안)니다고조부
증조부내려온얘기를
부모님으로부터 들은얘기
김씨가 아니네요
@@소설가-x3f 김씨에서 유씨로 파생된 성씨가 있음.
4국시대입니다 저도 가야의후손으로서 맞다라고 생각합니다
북부여 동부여도 있죠
그래서 열국시대
@@miju-wt1cr열국시대 > 전기 삼국시대 > 통일신라 > 남북국시대 > 후기 삼국시대 > 고려
가야는 금관가야 세력은 신라에 합류해서 신라의 힘이 됬고 신라 통일에 주역이 되죠. 왜로 간 세력은 경제 문화 발전에 영향을 주며 왜의 세력이 됬고 남 좋은일만 했다니깐
신라에 확실히 귀속되서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진 사람들은 대가야계열이지.. 금관가야는 신라에 병합된 이후 금관가야 지역을 식읍으로 받아서 다스리는 형태 였습니다.
아니지 처음에 금관가야를 먹고 김무력을 얻었으니 관산성 승리해서 대가야 먹는거지 후에 김무력 손자 김유신까지 그러니 최초의 금관가야 먹은게 큰거니까
영토는 식읍이든 뭐든 그게 그거고 중요한건 인재를 발탁하는거지 그게 김무력 김서현 김유신이고 덕배야@@김명곤-l7q
경북예천으로 갔겠지요.
이곳에는 온 산이 가야유적으로 덮혀있습니다.
지금은 도굴도 많이 되었겠지요.
그때의 오키나와는 별개의 국가였다
공영방송 에서 역사 방송 마이 해야지
500년동안 한반도는 고구려.백제.가야.신라 4국시대죠....3국시대는 서기 550년 이후 부터이구요.
가야를 넣어 팩트역사를 가르쳐야죠.
가야는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다지지 못했어요. 어쩔수 없져...
왜 가야는 6국으로 나뉘어 졌을까? 국민 구성원이나 선어가 달랐나? 통합 되었다면 국력이 강했을 텐데. 문화는 비슷한데 왜 분리 되었을까
말하자면 기업을 키운후에 형제들끼리 싸우지 않고 나눠 가진 것과 비슷한 이유 아닐까요 ?
어떤 국가든 초기에는 가야처럼 연맹체로 시작 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역사기 때문에 백제와 신라에 의해 역사가 조작 되었다고 생각 됩니다.
봄이 오면 대가야로 가자
역시 유인촌 선생님 👍 😎 😍 😂 😘
가야 고분군 유네스코 문화유산 선정 이후 가야사가 총 재조정 되었으면 하는바램...
오끼나와와 일본은 서로 다른 나라였었는데 무슨 뚱단지 같은 해설이야요?
김무력 김유신할아버지가 대승을 거두었네요... 김수로 김유신,, 우리 성씨.
어쩌면, 천여개의 무덤을 조성한 것은 하늘에 감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그 무덤조성의 모양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 신라 무덤의 발굴 시 갑자기 천둥번개 치고 비가 세차게 쏟아졌었다는 발굴자의 증언이 있는 다큐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도 피장자의 어떤 요소가(그의 몸의 요소, 그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의 요소, 그곳에 마음을 묻은 약 2천년전 어떤이들의 요소) 하늘과의 감응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동해안오징어 다큐에서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로 내렸다는 그 노 고고학자의 증언은 기억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보다 강화된 것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이라면 이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신묘한 힘과의 감응이라 얘기하고, 현대인들은 어떤 화학적 작용이라 얘기하는 것의 어떤 것 아닐까요? 고대에는 그것의 원리를 어떤 식으로든 이용한 그룹이 지배그룹이 되었을테고요. 저는 청동거울의 쓰임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지배그룹(지배자의 후손들이 불어나면서 여러 곳으로 떠나야 했던 이들)이 자신들의 소통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일종의 개인 봉화대 같은 것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 다큐를 보고 나니 백제는 (하얀피부의)제나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더욱 드네요. 그리고 대가야의 사람들도 부여계 사람들이고 고구려와도 백제와도 신라와도 연관이 있었지만, 시기에 따라 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구려와 원수가 되고, 백제와 원수가 되고, 신라와 원수가 됨으로써 결국 지배층은(남자들 위주) 떠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토속인이었던 여성들은 땅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전사로도 활약했지만 결국 다들 죽고.
인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사이비 과학으로 끝나서 안타깝..
@@lilcantabile444 고대에는 별자리 관찰이 중요한 일이었고, 청동기의 무덤에도 별자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요즘 유튜브에 있는카오스 강연의 물리와 화학을 듣고 있는데, 생각이 좀 더 진전되었습니다. 공부의 폭이 넓어지면 가정이 상상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기원전후 한반도와 고조선 그리고 청동기 시대에 대해 구체적 연결이 많이 진전된 것 같더군요. 백제와 가야, 신라에 대해서도요.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숭실대에 있는 세문청동거울은 원래 그런 본이 없었다면 만들어 볼 엄두도 못냈고, 본을 가지고 만들어도 손기술로는 만들 수가 없더군요. 그 본을 만드는 것은 기계전사로 문양을 찍고, 화학물질에 담구어 홈이 부식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요. 청동기 그들은 우리가 고대사람이라 폄하하는 것보다 훨씬 고도의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높은 곳의 대기 중에 있는 어떤 것에 감응하는 방법을 알았을 수도 있고, 가야의 무덤처럼 산덩성이에 시신을 어떤 간격 어떤 모양으로 배치함으로써 하늘의 별자리와 감응을 시도할 수도 있었겠죠.
아메리카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미국에서 거북선 발견 ㅡ ㄷㅏ 음 검 섹
해인사는 7번이나 복원했는데 만복사는 왜 복원 안했을까
얼핏 우리나라에는 어떤 이유로 합리주의가 정착할수 없었다고 단언한 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가야는 그당시 산업화에 필요한 많은 요소를 갖췄고 합리적인 무역과 외교를 잘 수행했지만 북방과는 그렇지 않았든 모양이다. 가야의 멸망이 요즘 떠오르는 저출산과는 관계가 없을지? 인해전술로 몰려올 북방군들에 그당시로는 초현대식 철갑기병까지 갖췄지만 저출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여전사 까지 동원해야 했으니 하는 말이다.
주보돈교수도 혹시 강단사학자 중에 한명인가요?
맞아요. 역사매국노
오키나와는 독립국이였는데 ?? 일본이랑 교역을 했다고 할게 아니라 오키나와랑 교역이 있었다고 해야 맞지 .
신라 매금이 열일하네ㅋ ㅋㅋㅋ
@@Ross6437-k2w 뭔 소리 하는 건가 이해를 못하갰네.
일본을 지명으로 쓰신 것 같네요. 류큐는 15세기는 가야 등장하니까요.
@@lilcantabile444 류큐가 15세기때 등장하지만 글타고 오키나와를 일본이라 말한 유인촌은 무식한건지 개념을 말아 먹은건지...ㅊㅊ
가야 누구왕무덤이라고 내부 금석문이라도 나왔나?
어떻게 누구왕 무덤 이라 확정적 비정을하는거지? , 피장자불명 이 상식아닌가
그러니까 추정 이라는 단어를 쓰잖아요. 월광태자=도설지도 추정이구요.
대가야 도와준 성산가야 이순유 아버지가 도와줌으로써 이순유가 조선에 도착하게 됩니다
어디로가야
누군가가 기록을 지운거야? 일부러?
부여도 있었기 때문에 오국이 날듯.. 아님 탐라, 우산, 마한 다 인정해서 팔국하든
역사에기본은 좀들아세요
가야와 나머지는 중앙집권화가를 거치지않아서 기냥 부족국가에요 왕조나라의 기준은 중앙정부 집권화가 기준이에요
제발역사를 특히고대사를 논할땐기본은 알고 글좀씁시다 정말 아이쿠
@@이관호-f7t 가야는 각국이 다 중앙집권국가였는데? 개 웃기네ㅎㅎ
@@로건리-h2g 관호처럼 어설프게 아는 친구들이 아는척하는 법이지요 ㅎ
띄워쓰기나 배워라 😂
광고 좀 줄여줘요
요즘 고령가야 유튜브에 관련해서 ~~
선덕여왕에서 주상욱이 맡은 월야의 부친인가
매금이가 누구임?
국사단 자리는 자미원국중 태미원의 자리로 엄청난 대명당
유인촌도 관리만 잘했으면
한국의 대표 배우로 남았을텐데.
철학이 없는 이가 욕심만으로 정치판에 들어간 대표적 사례.
유인촌이 나오니 보기싫어지네
찍지마! XX 찍찌마!!
대가야의 역사가 520년인데 왕의 계보가 5명 밖에 안된다고 파악되었는데 한명이 100년씩 다스렸다? 믿기지 않음.🥵
차라리 대가야인의 후손 족보를 가지고 고증하는게 낫겠다.
아이큐가 원숭이인가? ㅋㅋ
월광사에 가야족보가 있지 않을까
오키나와는 당시 일본이 아니였다.
21년전 방송
해인사밑에 월광이란동내가 현제도있는데
동내.현제????
가야때 부터 신라는 배신의 아이콘이네
외세를 끌어드린 백제는 가야와 일본과 손잡고 한민족 신라를 공격하다 하지만 금관가야 출신 김무력의 무력에 의해 초토화되고 가야전체가 신라에 병합
결혼 동맹해놓고 몰래 뒤통수칠 생각한 백제의 성왕의 말로 최후 고구려 밀어내고 한강 먹었으면 그냥있지 신라한테 더 진격안한다고 불만 고구려 무서워 한강방어
신라한테 맞겨놓고 배신 덤탱이 씌우고 그 명분으로 관산성 (이릉대전급) 일으키다 김(구)해의 금관가야가 대단하긴 하네 3째아들 무력이 그의 손자 유신이까지
대단한 신라야 이사부 사다함 선덕 진덕 여왕들까지 그와중에 내분의 적 비담까지 압살하고 고구려 백제는 개소문과 그의 아들 3인 방귀와 예식진한테 말아처먹지ㅉㅉ
최약체 경상도 신라가 드라마틱하다 그러고보면 경상도지역이 인재가 많아 신라+가야 고구려는 중국과 북한이고 백제는 서울 경기 인천 강원 충청도 전라도 6도를 가지고도
2도를 가진 신라한테 개처망했네 ㅋㅋ관산성전투는 진짜 삼국지 이릉대전급이다
저당시는 어차피 서로 쫓고 쫓기는 시대 신라한테 안먹혔음
백제나 왜구한테 먹혔겠지
Tv켜보면그사람들안나오는날이없다 너무지루하다 그렇게 사람이 없는걸까
어차피 가야는 일본에 더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니 야마토로 갔겠지 뭐
일본 전방후원분(장고형무덤) 순장터 나오는곳은 거의 가야(야마도) 땅이지
매금이 출동 ㅋㅋㅋㅋ
월광 스님 아니였나요.
월광 태자 였군요.
21년전 ㄷㄷ
조개 찾잔 같네요
왜 가야에는 무덤 속이나 어디에도
지석 등 문자가 안발견되는 가
무덤내부 금석문이 없다는것은 분명 비정시 큰문제가 되는데, 이상하게도 누구왕무덤 이렇게 확정적 비정을 한다는것임, 좀 어이가없죠 ,
천마총은 분명히 이사지왕이란 칼자루 명문이 3개인가 출토되었는데 이사지왕 무덤이라 불리지도 않고 아무튼 상식으로 이해가 안됨,
역대기록상 신라왕중 이사지왕은 없는데 신라꺼라 우기는 현실
대한민국 역사는 가려 들어야함
정치의 산물이다 할 정도니까
김해김가.가 말 합니다.
틀린것은 마지막생. 잘못.
신화가 좋을까?
장수 했는대 왜 지금은 단명 할까?
간신의 세상이...
도 딲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대. (장수) 간신말에 속아온 세월이 한참...
김수로왕님 체질 정치를 했기에 건강하고 장수 했다.
팔.체질. 중
태양인2 가
잎채소 와 바다생선 을 먹어면 건강하고 장수도 한다
간신은 골루골루 먹어야 좋타고 ....
먹엇다 병걸리고 단명 했다
골루골루 가?
잎채소 와 바다생선 외
뿌리채소 와 육고기 를 먹어니 병걸리고 단명
시청료 받아서 20여 년 전에 만든 콘텐츠에 무슨 광고를 이렇게 붙이는 겁니까?
*매금이 보유 계정*
*1. 매금*
*2. 고구려 백제 중국사*
*3. 김국빈*
*4. 대신라혼*
*5. 김유신 태대각간*
*한번도 부정 안함 ㅋㅋ*
*아마 김국빈이 실명이 아닐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긴 뭐라하겠니 ㅋㅋㅋㅋ
일본서기, 속일본기 지 맘에 드는 구절만 발췌후 왜곡
ㅋㅋㅋㅋㅋㅋㅋㅋ 알고봤더니 전라도는 백제가 간접지배함 ㅋㅋ 그리고 영남지방에도 독무덤이 발견됬는데 이건 뭐라할거냐? 내물왕 시절이나 신라 초기인데? ㅋㅋ
왜곡은 죄임!!
@@고구려백제중국사들전 ㅋㅋㅋ 다만 본디 마한의 맹주국은 기원전 190년경에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세력이 건국한,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었던 건마국이었다. [3] 하지만 기원후 3세기의 시점에서는 주도권을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청당동에 자리잡은 걸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삼한 전체의 명목상 영도국이었던 목지국에게 빼앗긴 상태. 그러나 전라도의 다른 마한 거수국들이 전부 목지국의 직접 지배 아래 혹은 훗날 백제가 주도했던 간접 지배 단계에 있었던 건 아니었다. 목지국의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는 없으되 훗날 등장하는 백제에 비하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마한이라는 연맹체에는 크게 보아 한강~임진강 유역권, 안성천 일대, 금강 유역권, 영산강 유역권, 섬진강 유역권 등 다섯 유역권으로 분류해 볼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목지국만 못 했던 걸로 추정되지만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 역시 나름 세력이 있었기에 그 지역들에는 그렇게까지 크게 미치진 못 했던 걸로 보인다. 섬진강 유역권은 세력은 미약하였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 백제에게 소멸된 이후에는 백제가 목지국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꽤 지향점이 다른 고대 국가였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세기~5세기까지, 영산강 유역은 고유의 묘제가 6세기까지도 유지된다.[4]# 다만 침미다례임이 유력한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후기 마한 연맹체를 이끈 바 없으며, 굳이 후기 마한 연맹체의 영도국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국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왜계 전방후원분(초기 횡혈식 석실분)[5] 또는 가야 세력의 유물이 전라남도 일대에서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백제의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 수록 침투해가면서 영산강 유역 세력의 타지 진출을 제한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마한이 백제에 편입되는 과정은 목지국을 대신해서 맹주국이 된 백제가 다른 마한 소속 연맹 국가들을 중앙 집권체제로 편입해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6]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바탕으로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근초고왕이 마한, 즉 전라도 남해안 일대까지 모두 정복했다는 학설은 문제가 있는 학설이었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록 자체가 왜(倭)의 한반도 정벌이라는 황당무계한 내용에 여기에는 또 왜(倭)의 신라, 가야 정벌 기록도 있는데 신라, 가야를 정벌했다는 기록은 외면하고 굳이 침미다례만 콕 집어 마한 전체를 정벌했다고 해석했던 게 그것. 다만 지명의 비정이나, 근초고왕 이후 고고학적으로 금강 유역권 일대의 성장이 억제되는 점, 그리고 백제가 대방군(현 황해도 일대)의 옛 교역 루트를 장악하는 데는 성공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가 오늘날의 광주전남 서부 일대 영산강 유역의 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되는 신미-침미다례를 지배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옛 목지국 수준의 위상을 영산강 유역 세력권에까지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건 무리한 추정이 아니다.[7] 이러한 설은 이병도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를 근거로 주장한 이론으로만 주장하는 게 아니라, 2000년대 후반에 충청남역사문화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의 웅진백제 편에서 삼국사기까지도 고려하여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475년 백제가 한성 함락이란 초유의 사태를 거치면서, 이 시기를 전후해서 금강 일대 세력이 성장한다. 당연히 이 시기에 영산강 유역 세력은 독자성이 더 강해지며[8] 그래도 거리가 보다 가까운 금강 유역 세력은 적어도 4세기 후반 ~ 5세기 초반까진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보다 더 세력이 강한 영산강 유역은 시간이 더 걸렸다. 국보 제295호 나주 금동관이 보여주듯 6세기 초중반에는 오히려 더 큰 성세를 자랑하게 된다. 이 세력은 독자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행했던 데다 웅진백제가 주도하는 대고구려 연합전에 초반에는 오히려 대가야보다도 시큰둥한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백제를 크게 긴장시킨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이 시기에 신라, 대가야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큐슈 일대와 교역을 강화하며 힘을 키운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날 정도. 거꾸로 이 시기 대가야의 경우 신라보다는 백제 쪽으로 문화나 경제적, 군사적 의존도가 기울어지는 경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한성 함락으로 밀려나 현재의 충북 지역까지 털리던 백제가 갑자기 무령왕릉 시기 고구려까지 쳐들어간 배경에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지원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 또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에 영산강 일대를 백제 체제에 편입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된다. 영산강 유역은 거리도 멀고 원래부터 부강한 곳이었기에, 백제의 영향력 투사 혹은 연합이 가장 마지막에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한편 호남 동부 섬진강 유역 일대는 그 시대 기술로는 평지가 적고 물살도 좁고 빨라 큰 공동체가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때문에 영산강 유역과는 달리 공동체들이 죄다 따로 노는 분위기로 해석된다. 다만 또 다른 의문은 바로 가까운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이곳에 전혀 진출하지 못한 것인데, 유력한 추측은 백제국의 견제 밖엔 없다. 백제국에게 막 맹주 자리를 빼앗긴 목지국이 여전히 망하지 않은채 백제국에게 직간접적으로 열심히 반항하며, 한편 마한 신미국이란 명칭으로 대외에 자칭하면서[9] 백제국의 마한 대표 자격에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이의를 제기하던 4세기 초에, 오히려 가야가 섬진강 유역과 활발한 교역을 추진하게 된다. 때문에 현재 전북 지역인 남원시, 장수군, 구례군이나 순천시, 여수시 같은 섬진강 유역 지자체는 가야 계통 유물과 고분들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고대 국가 형성기에 철기문화의 모태 지역으로 철기 유적이 밀집된 현재의 전북 지역은 마한과 가야 문화의 공존과 융화된 모습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이로부터 가야의 국력이 확장하는 계기가 된 지역으로# 이들 지자체에서도 가야사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10]
목지국이 3세기 중후반 백제에게 소멸된 이후에는 백제가 목지국이 하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백제는 목지국과는 꽤 지향점이 다른 고대 국가였다. 금강 유역은 적어도 4세기~5세기까지, 영산강 유역은 고유의 묘제가 6세기까지도 유지된다.[4]# 다만 침미다례임이 유력한 영산강 유역 세력은 후기 마한 연맹체를 이끈 바 없으며, 굳이 후기 마한 연맹체의 영도국을 든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백제국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왜계 전방후원분(초기 횡혈식 석실분)[5] 또는 가야 세력의 유물이 전라남도 일대에서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백제의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 수록 침투해가면서 영산강 유역 세력의 타지 진출을 제한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마한이 백제에 편입되는 과정은 목지국을 대신해서 맹주국이 된 백제가 다른 마한 소속 연맹 국가들을 중앙 집권체제로 편입해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6]
그러나 475년 백제가 한성 함락이란 초유의 사태를 거치면서, 이 시기를 전후해서 금강 일대 세력이 성장한다. 당연히 이 시기에 영산강 유역 세력은 독자성이 더 강해지며[8] 그래도 거리가 보다 가까운 금강 유역 세력은 적어도 4세기 후반 ~ 5세기 초반까진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보다 더 세력이 강한 영산강 유역은 시간이 더 걸렸다. 국보 제295호 나주 금동관이 보여주듯 6세기 초중반에는 오히려 더 큰 성세를 자랑하게 된다. 이 세력은 독자적으로 대중국 외교를 행했던 데다 웅진백제가 주도하는 대고구려 연합전에 초반에는 오히려 대가야보다도 시큰둥한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백제를 크게 긴장시킨다. 영산강 유역 세력은 이 시기에 신라, 대가야 그리고 심지어는 일본 큐슈 일대와 교역을 강화하며 힘을 키운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날 정도. 거꾸로 이 시기 대가야의 경우 신라보다는 백제 쪽으로 문화나 경제적, 군사적 의존도가 기울어지는 경향이 드러나는 걸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경향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한성 함락으로 밀려나 현재의 충북 지역까지 털리던 백제가 갑자기 무령왕릉 시기 고구려까지 쳐들어간 배경에는 영산강 유역 세력의 지원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5세기 후반 ~ 6세기 초반 또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에 영산강 일대를 백제 체제에 편입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된다. 영산강 유역은 거리도 멀고 원래부터 부강한 곳이었기에, 백제의 영향력 투사 혹은 연합이 가장 마지막에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한편 호남 동부 섬진강 유역 일대는 그 시대 기술로는 평지가 적고 물살도 좁고 빨라 큰 공동체가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때문에 영산강 유역과는 달리 공동체들이 죄다 따로 노는 분위기로 해석된다. 다만 또 다른 의문은 바로 가까운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이곳에 전혀 진출하지 못한 것인데, 유력한 추측은 백제국의 견제 밖엔 없다. 백제국에게 막 맹주 자리를 빼앗긴 목지국이 여전히 망하지 않은채 백제국에게 직간접적으로 열심히 반항하며, 한편 마한 신미국이란 명칭으로 대외에 자칭하면서[9] 백제국의 마한 대표 자격에 영산강 유역 세력이 이의를 제기하던 4세기 초에, 오히려 가야가 섬진강 유역과 활발한 교역을 추진하게 된다. 때문에 현재 전북 지역인 남원시, 장수군, 구례군이나 순천시, 여수시 같은 섬진강 유역 지자체는 가야 계통 유물과 고분들이 나타나고 있고, 특히 고대 국가 형성기에 철기문화의 모태 지역으로 철기 유적이 밀집된 현재의 전북 지역은 마한과 가야 문화의 공존과 융화된 모습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이로부터 가야의 국력이 확장하는 계기가 된 지역으로# 이들 지자체에서도 가야사 연구를 지원하고 있다.[10]
출처
namu.wiki/w/전라도#s-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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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우의 위치 비정에 따르면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19개 국이 전라도 지역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노령산맥 이북의 마한 소국들은 1세기 무렵에 백제 온조왕과 다루왕에게 통합되고, 노령산맥 이남에 남아있던 마한세력은 백제의 영향 아래 침미다례라는 연맹을 형성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백제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가야가 순천, 여수 등지를 침략하고, 남원 일대에 기문 지방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후에 국력을 회복한 백제가 침미다례를 탈환하고 가야세력을 축출하여 전라도의 마한 세력은 완전히 백제에 통합되었다. 백제는 지방행정단위인 5방(方)중에 현재의 전라북도 지역에 고부군을 치소로 중방(中方), 전라남도 지역에 장성을 중심으로 남방(南方)을 설치하였다. 백제 무왕이 익산을 천도지로 선정하고 미륵사를 창건했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영토에는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설치되고, 현 전라도 지방에 6개 주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으로 인해 웅진도독부의 행정 구역은 제구실를 못했으며,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무시하고 지금의 나주를 치소로 발라주(發羅州)를 설치하였다. 당나라 세력을 몰아낸 신라는 685년 경에 전국을 9주로 정비하면서 발라주의 치소를 지금의 광주로 이전하면서 무진주로 개칭하고, 전북지역에는 완산주가 설치되었다. 완산주에는 10개의 군, 31개의 현, 그리고 남원경이 설치되었며, 무진주에는 14개의 군, 44개의 현이 있었다. 757년에는 완산주를 전주(全州), 무진주를 무주(武州)로 고쳤다.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신라가 내분 등으로 혼란에 빠지자 각지에서는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는데 892년에 견훤이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에서 성장하여 완산주(지금의 전주시)를 석권,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903년에는 나주를 중심으로 서남부 해안 지방을 왕건이 손에 넣어 후고구려의 영토로 삼기도 했다. 936년에 고려에 의해 후백제가 멸망하고 현 전라도 지방은 고려에 통합됐다.
@@남진혁-v6s 님 애쓰지 마셔요ㅋㅋ 저 분은 역사적 사실이나 그런거 관심 없어요 저도 첨엔 님처럼 찾아가며 논리적 반박해봤는데 소용없음 저 분의 주장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녜요 저 분은 역사를 도구로 자신의 정치성향을 보이는 중이라ㅋㅋ 특정지역을 혐오하고 결국 갈라치기하는걸 목표로 하는 사람임 님께서 열시미 찾아서 떠먹여줘도 절대 인정 안해요 저 분의 역사적논쟁 하는게 아니라 여기서 정치질 하는거라 같은 주제를 이야기 하는것 같아도 저 사람 답은 정해져 있고 말하고자 하는것은 정해져 있어서 결국은 다른 이야기하는거임ㅋㅋㅋ
자기가 밀리면 교묘히 주제 돌리면서 피함
상대하실 필요 없어요 시간과 정신에 해로움
역사를
명복을 빕니다 ❤🎉
동행하는 차문화/철수 김원태 시인
흐트러져 흐물흐물 공중에뜬
마음들에 달달함을 침투시켜
활기참을 넣어본다
본래 맛을 아양으로 변모를한
살가운 맛이다
쩍쩍하고 달라붙는 부드러운 맛이다
시작하는 정서들을 다독이며
만져주며
살맛 나게 발자국을 떼게 하는
너는야 마법사이로다
온몸을 훑어서 내려가며 주물고 만지작거리며
깎고 다듬어 살포시 갈 길 간다
나의 입이 한말을 기억한다
간단하고 속성인
자판기 커피가 좋아라,
잠을 깨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차 문화의 커피타임 활기차게 내 정서에 찾아든다.
고려문화 연구 이사장 한양대 김병모 🎖명예교수🎖
南아시아 농경인 고인돌
北아시아 금관 유목민 솟대
인도계 쌍어 신앙 ᆢ 한국 🇰🇷人 성씨 ᆢ
ᆢ김 허 설 손 배裵 최 정 李
ᆢ천손 난생 신神귀신 화話말씀
성남시장 이재명 두산건설 임원 만나다
아베 노부유키 1945년 조선총독부의 수자입니다
대한민국 식민사학의 계繼 보保 자者놈들...
제1세대 이병도 신석호 손진태
제2세대 김철준(전 서울대 교수)
제3세대 노태돈(서울대) 이기동(동국대) 주보돈(경북대)
잊지말라 한국 🇰🇷 역사왜곡 🇰🇷 바로 세우는 혁명입니다
고)박원순 역사왜곡 남발자 이하 대한민국 🇰🇷 주적입니다
그자가 곧 뜨겠구만!
*매금이 보유 계정*
*1. 매금*
*2. 고구려 백제 중국사*
*3. 김국빈*
*4. 대신라혼*
*5. 김유신 태대각간*
*아마 김국빈이 실명아닐까?*
민주주의는 좋은 것!! 개소리를 해도 안잡혀감ㅋㅋ 좋은세상이다~
ㅋㅋㅋ 그래서 님은 역사를 논하는데 신뢰를 못주는거예요 역사 논하는데 자신의 정치성향에 끼워 맞추려다보니 사실은 비틀고 왜곡하고 한쪽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님이 뭔가는 많이 아는것 같아도 결국 이 정보 저 정보로 정치적인 입장 대변하게 될 뿐임..
그래서 첨엔 님하고 열시미 논쟁이란걸 하다가 이제 님하고 역사 논쟁 안하게 됐죠
님의 모든 근거와 주장은 역사논쟁이 아닌게 뻔하니까 그저 님은 저를 비롯한 다른 많은 분들의 조롱의 대상이자 밈의 대상이 된거죠^^
님이 저랑 극단적으로 갈리는 주장을 하셨더라도 만약 역사적 논쟁을 했다면 전 절대 님을 조롱하거나 ㅂㅅ취급 안했음 최소한의 님의 의견을 존중은 했음 제가 모르는 사실에 대해 공부도 했을거고..
그런데 님은 정치이야기중 그것도 매우 편향적으로 특정세력을 혐오하는 방향으로 매우 못된 방식의 정치질을 하고 계심
그래서 전 님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저 개소리일뿐..^^
그럼 또 개소리 하셔요~ 전 이만~
매금이 귀신이네 ㅋㅋㅋㅋ 😨 😨 😨
김국빈도? 정보 감사합니다
c bal 궁금해서 보려고 들어왔는데 저화상 유가가 또 나오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셈 !
유인촌 지금은 뭘하고 지낼까??
보고 싶네요!
역사는 참 배워도배워도 끝이 없어라~
유인촌에서촌장으로생활하고있습니다.전원일기도보고.ㅎ.
연극....
44대 문체부장관 되셨어요
월광, 고약광, 김일...
01년이면 나 20살 때 방송했었구나....대학입학하고 정신없이 놀때네 ㅎ
월광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군대 있을때 한번은 이여자,한번은 이여자 매주 번갈아서 면회 왔는데 제대 할때는 과감하게 한 여자만 선택한다고 하였음.그가 월광임.하나 더있네?
포상팔국의 난은 안다루나
우륵12곡 작곡 이유가 제국의방언이 달라 작곡 했다. 근데 위치 보면 바로 옆동네 인데 방언이 얼마나 다르다고? 지금도 8도 경계선지나야 많이 틀리고 못알아? 먹을 정도 일껀데 아무리 부족국가 당시라 하지만 제국 이라 하기 초라할 정도다.
천정? 일본한자어.
우리말 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