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내가 내 삶을 불행하다고 느꼈던 때는 내가 속한 주변과 나의 리듬이 맞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다. 마음도 몸도 그랬다. 웃으면 왜 웃나 싶어 궁금하고 멋쩍기도 하고 자꾸만 어디론가 간다기에 따라 나섰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너무 내 리듬을 고수하며 편안함의 경계 안에서만 있어도 안 되겠지만 몸과 마음이 병들지 않으려면 나의 본성적인 리듬을 잘 파악하고 이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렇게 서서히 나의 경계를 넓히면서 내가 가진 리듬도 조금 더 다채로워지길 기대해 본다.
철학은 지적 만족감을 주는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을 놓고 너무 당연한 것을 말합니다 - 가끔 아주 어렵게, 혹은 매우 순수하게... 누가누가 설명 잘 했나? 누가누가 좋은 삶, 혹은 사회의 방향을 제시했나? 어찌 보면 놓치고 살던 당연한 진리를 꼬집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우리에게 숙고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냥 자연 따라 사는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일자무식인 우리 할머니는 주둥이와 손으로 현학적 글을 쓴 사람들보다 훨씬 존재의 무게감이 있습니다. 아우라는, 사고 실험이나, 어리석음을 관찰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어제 친구 딸의 돌잔치에 갔었습니다. 거기있던 총각 친구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 ‘나는 언제 결혼해서 언제 애기 낳을까?’ 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돌잔치 오기 전에 저 말 서로 한번식 하기로 짜고 왔나?’ 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들은 세상의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가속화’를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너의 인생은 지금 리듬이 너무 느려! 어서 서둘러! 그렇지않으면 너는 세상으로 부터 소외감을 받을걸?’ .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머릿속 생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충코님 뭔가 그 조심스러운 성향이 좋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과도한 표출은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쇼펜하우어 말이 기억이 나고... ㅎ 뜬금없지만 세계사 흐름 보면 영미권 영향력에 대해 간과할 수가 없는데.. 중국 일본도 별로지만 세계사 반열에 이 나라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도 신기하긴 하다는 상상만 해 봅니당 ㅎ
강변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요즈음, 나만의 페이스에 맞게 뛸 때가 가장 기분이 만족스럽게 흘러감. 만족감을 농구골대에 비유하자면 농구공이 가장자리인 림에 걸치지않고 링안에 쏘옥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그 페이스의 타협마저도 뛰다보면 무의식적이게 타협점을 찾죠. 굳이 표현하자면 오늘은 그냥 그렇게 달리고싶어서.
인간 신체의 진화적 변화가 원인이든,,, 아니든 ,,, 어떠한 새로운, 순수 카오스적 리듬도,,, 표상적 자아와, 또 다른 이데아적 자아 사이에 공감대만 형성된다면 ,, 자기 리듬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즉, 타인 또는 다른 개체와의 공감은 불필요하다,, 뭐 이런 이야기죠 ~~ 그냥 순간적으로 생각 샘물이 솟아 한 마디 적어봅니다 ~~^^
세 번째 말씀과 관련하여, 리듬과 주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생각해보자면, 리듬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두께가 필요한 듯합니다. 리듬은 시간적인 것이어서, 찰나에는 인식하는게 불가능한 것 같고요. 그러나 주름은 공간적인 것이어서 찰나에 드러나는 듯합니다. 주름은 리듬의 흔적으로서 다시 리듬에 영향을 주는 듯합니다. 유전자의 표현형이 유전자에 영향을 주듯 말이죠. 이것은 첫 번째 말씀과도 관련지어볼 수 있을 듯합니다.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것,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것, 리듬과 리듬이 연결되어 흐르는 것을 매개하는 주름이 있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말씀에 관해서는 카오스적인 것은 날씨와 같은 변덕스런 것과 연결될 때도 일어나고, 버블이나 쇠퇴나 질병에 의해서도 일어나지만, 또한 리듬에 대한 인식에 의해서도 일어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리듬을 인식할 때 그것은, 리듬이 변덕스러운 존재와 연결된다는 걸 의미할 테니까요. 버블과 쇠퇴와 질병이란 속성을 가진 주름진 존재 말이죠.
생각해보면 내가 내 삶을 불행하다고 느꼈던 때는 내가 속한 주변과 나의 리듬이 맞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다. 마음도 몸도 그랬다. 웃으면 왜 웃나 싶어 궁금하고 멋쩍기도 하고 자꾸만 어디론가 간다기에 따라 나섰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너무 내 리듬을 고수하며 편안함의 경계 안에서만 있어도 안 되겠지만 몸과 마음이 병들지 않으려면 나의 본성적인 리듬을 잘 파악하고 이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렇게 서서히 나의 경계를 넓히면서 내가 가진 리듬도 조금 더 다채로워지길 기대해 본다.
리듬 물 심장
혼돈과 질서의 어디인가
능동과 수동사이
사회의 리듬과 나 사이의 관계
규칙성 - 스스로의 소리에 집중해보기
오늘도 감명 깊네요.. 충코님은 유튜브의 순기능에 해당됩니다. 늘 건강하십쇼 감사합니다
철학은 지적 만족감을 주는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을 놓고 너무 당연한 것을 말합니다 - 가끔 아주 어렵게, 혹은 매우 순수하게...
누가누가 설명 잘 했나? 누가누가 좋은 삶, 혹은 사회의 방향을 제시했나?
어찌 보면 놓치고 살던 당연한 진리를 꼬집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우리에게 숙고할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냥 자연 따라 사는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일자무식인 우리 할머니는 주둥이와 손으로 현학적 글을 쓴 사람들보다 훨씬 존재의 무게감이 있습니다.
아우라는, 사고 실험이나, 어리석음을 관찰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정말 울림이 있는 내용이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삶을 리듬에 맡겨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가 가장 행복하고 편안했던 것 같아요.
또, 그런 상태를 명확하게 말로 풀어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번에 정리가 되는 느낌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
저도 공감^^
직접 적은 자막을 넣어주시니 지하철에서 보기 편하네요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이 생각나네요.
순간을 사는건 어떤느낌일까요
어제 친구 딸의 돌잔치에 갔었습니다.
거기있던 총각 친구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이
‘나는 언제 결혼해서 언제 애기 낳을까?’ 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돌잔치 오기 전에 저 말 서로 한번식 하기로 짜고 왔나?’ 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들은 세상의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가속화’를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너의 인생은 지금 리듬이 너무 느려! 어서 서둘러! 그렇지않으면 너는 세상으로 부터 소외감을 받을걸?’ .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머릿속 생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잘키울 능력이 없다면 낳지않는게 맞지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자기 리듬을 바라볼려는 노력이 결여됬는거 같네요. 능동 , 수동은 파악하기 쉬우나 그 중간의 무언가는 애매해서 파악하기 어려워 그때 만큼은 그냥 살았던거 같아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삶의 속도에 지쳐있었는데....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영상이었습니다.
헐 제가 물리 공부하다가 하게 됐던 비슷한 통찰을 여기서도 보다니 고딩으로써 혼자 나름대로 깊은 통찰을 얻은 것 같아 뿌듯해하던 것도 역시나 겸손해지는 영상이네요 흐헣허ㅓ허 ㅎㅎㅎ ㅜㅜㅜ항상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맞아요..속이 뻥 뚫린 느낌이드는 날에는 거울만봐도 리프팅뿜뿜 목소리텐션 전부 좋져~자신의 속도나 높낮이를 잘아는거...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리듬은 느린편인데 일터에서는 사수의 빠른 리듬에 맞춰야해서 힘이드네요.
충코님 뭔가 그 조심스러운 성향이 좋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과도한 표출은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쇼펜하우어 말이 기억이 나고... ㅎ 뜬금없지만 세계사 흐름 보면 영미권 영향력에 대해 간과할 수가 없는데.. 중국 일본도 별로지만 세계사 반열에 이 나라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도 신기하긴 하다는 상상만 해 봅니당 ㅎ
강변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요즈음, 나만의 페이스에 맞게 뛸 때가 가장 기분이 만족스럽게 흘러감. 만족감을 농구골대에 비유하자면 농구공이 가장자리인 림에 걸치지않고 링안에 쏘옥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그 페이스의 타협마저도 뛰다보면 무의식적이게 타협점을 찾죠. 굳이 표현하자면 오늘은 그냥 그렇게 달리고싶어서.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사회 리듬과 자신의 리듬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도 중용이라는 단어가 떠올리는 내용이네요. 고전을 읽다 보면 인류의 위대한 성인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 신체의 진화적 변화가 원인이든,,, 아니든 ,,,
어떠한 새로운, 순수 카오스적 리듬도,,, 표상적 자아와, 또 다른 이데아적 자아 사이에 공감대만 형성된다면 ,, 자기 리듬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즉, 타인 또는 다른 개체와의 공감은 불필요하다,, 뭐 이런 이야기죠 ~~
그냥 순간적으로 생각 샘물이 솟아 한 마디 적어봅니다 ~~^^
어떤 계기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풀어나갈 생각을 하셨나요? 이런 통찰을 이루게 된 과정이 너무 궁금해요
영상 맨 끝에 말씀드렸지만, 상당 부분 Mario Wenning이라는 사람의 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용 좋네요^^
세 번째 말씀과 관련하여, 리듬과 주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생각해보자면, 리듬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두께가 필요한 듯합니다. 리듬은 시간적인 것이어서, 찰나에는 인식하는게 불가능한 것 같고요. 그러나 주름은 공간적인 것이어서 찰나에 드러나는 듯합니다.
주름은 리듬의 흔적으로서 다시 리듬에 영향을 주는 듯합니다. 유전자의 표현형이 유전자에 영향을 주듯 말이죠. 이것은 첫 번째 말씀과도 관련지어볼 수 있을 듯합니다.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것,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것, 리듬과 리듬이 연결되어 흐르는 것을 매개하는 주름이 있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말씀에 관해서는 카오스적인 것은 날씨와 같은 변덕스런 것과 연결될 때도 일어나고, 버블이나 쇠퇴나 질병에 의해서도 일어나지만, 또한 리듬에 대한 인식에 의해서도 일어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리듬을 인식할 때 그것은, 리듬이 변덕스러운 존재와 연결된다는 걸 의미할 테니까요. 버블과 쇠퇴와 질병이란 속성을 가진 주름진 존재 말이죠.
대화할 때도 리듬이 안 맞으면 힘들어요ㅜ
크~
혹시 썸네일 작품 제목좀 알 수 있을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