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의 필수관문!! 희망의 신학 간단하게 감잡기!! | 몰트만 & 판넨베르크 & 희망의 신학 인트로 | 신학자 해시태그 | [오늘의 신학공부]

แชร์
ฝัง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17 พ.ย. 2024

ความคิดเห็น • 15

  • @TV-et4ty
    @TV-et4ty 5 ปีที่แล้ว +3

    오시는 하나님..마치 다음달 월급날 같은 느낌이네요..🤭

    • @theologytoday
      @theologytoday  5 ปีที่แล้ว +1

      느낌 팍 오네요ㅎㅎ 👍👍

  • @예수교회-m1b
    @예수교회-m1b 4 ปีที่แล้ว +2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종말에 천국, 영생 ,하나님의나라 등등으로 표현되는 희망(소망)을 얻을 수 없다면 현세에서 기독교적인 사랑의 윤리를 지향해야할 이유 또한 없을 것입니다.

    • @예수교회-m1b
      @예수교회-m1b 4 ปีที่แล้ว +1

      절망과 허무의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에의한 불멸의 소망을 전파함은 그들이 소망을 붙잡고 사랑으로 살게하게위 한것이고 이러한 소망과 사랑은 그사람을 행복하고 보람있게 인생을 살게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 영생을 얻게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을 믿는것이 몰트만의 신학이고 기독교인의 기본입장일 것입니다.

    • @theologytoday
      @theologytoday  4 ปีที่แล้ว

      whdgo rla 네 그게 “모든 것을 멸절시키는 무”를 견디게 하는 기독교 희망의 의의인 것 같아요~

  • @일옥-i3x
    @일옥-i3x 5 ปีที่แล้ว +3

    고통의 문제와 해석이 성서에서 출발한 사건에관한 건들은 기독교가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해명해야해요. 자유의지론은 무의식(프로이트)이랑 소비이론(보드리야르) 때문에 거의 궤멸상태고, 해석학의 경우 철저한 무신론에서 전제해야하기때문에, 해석의 세계에는 정답이없기 때문이에요.

    • @aphilosophizingsquid
      @aphilosophizingsquid 5 ปีที่แล้ว +3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여전히 분석적 심리철학과 윤리학의 중요한 논쟁거리입니다. 오히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지닌 지위는 의학계와 철학계 모두에서 예전보다 훨씬 약화되었습니다. 보드리야르 역시 20세기 초반의 중요한 철학자 중 하나이기는 해도, 그의 논의가 '자유의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직접 건드리지는 않을 뿐더러, 그가 오늘날 철학과 사회학의 논의를 대표하는 학자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반대로, 보드리야르는 자신을 프랑스 철학계가 그다지 높이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서운해한 것으로 유명하죠.) 무엇보다, 해석학이 철저한 무신론을 전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철학적 해석학의 전통을 형성한 주요한 학자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슐라이어마허와 불트만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로도 유명하고,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가톨릭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가다머와 리쾨르는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해석학은 그리스도교 전통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신학계에서는 티슬턴과 벤후저 등이, 철학계에서는 웨스트팔 등이 신학적 통찰을 해석학적으로 발전시키거나 해석학적 연구를 신학적 논의에 접목시키기도 합니다.

    • @일옥-i3x
      @일옥-i3x 5 ปีที่แล้ว +1

      @@aphilosophizingsquid 아, 그 무신론적이란 정답이없는 해석의 세계의 성질이 그렇다는거고요. You seok Youn님의 깊은생각을 존중합니다^^ 실은 소비이론건은 저의 경험에 비추어본 의견입니다. 제가 kfc를 자주가는데 서브웨이와 몇안되는 음료 무한리필이 가능한 곳이라서요, 거기서 코카콜라만 여러번 떠마시거든요. 거의 습관인지라 제가 다른 음료들을 의식한줄 알면서도요. 코카콜라가 그만큼 유명하고 맛있다는 타인의 권한을 따르다보니 버릇들이면 진짜로 제가 그 코카콜라에게 선택 당할수있다는 생각이들어서요. 하도 같은것만 마셔서 요즘 제가 콜라를 마신다는 느낌이 안들지경입니다;; 암튼 이런 경험때문에 자유의지론에 회의적으로 바뀐거고요. Youn님의 의견도 타당합니다.

  • @김형준-c7q
    @김형준-c7q 4 ปีที่แล้ว +1

    오신공님 동영상 정주행중...😀😅 머리가 터질꺼 같지만 재밋어요👍🏻👍🏻

    • @theologytoday
      @theologytoday  4 ปีที่แล้ว

      아이고 ㅎㅎ 감사합니다🙌

  • @aphilosophizingsquid
    @aphilosophizingsquid 5 ปีที่แล้ว +5

    잘 보았습니다. 다만, 몇 가지 의문점이 있는데,
    (1) 몰트만과 판넨베르크가 '종말론'과 '부활'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두 신학자를 모두 '희망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하는 것이 정당한지는 의문스럽습니다. 보통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보다는 '보편사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데다, '종말'과 '부활'을 이해하는 방식도 몰트만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몰트만의 신학은 미래가 항상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반면,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역사의 종말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계시되었기 때문에 보편사가 완성되어 있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지 않나요? 가령, 몰트만은 이런 점 때문에 [희망의 신학] 1장 7절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로서의 '역사'"에서 판넨베르크, 렌트로프 형제, 빌켄스를 '보편사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장과 대립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몰트만이 바르트에게서 희망의 신학을 위한 자취를 발견했다는 주장은 어떤 자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가요?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바르트와 불트만의 신학을 각각 '하나님의 초월적 주체성의 신학'과 '인간의 초월적 주체성의 신학'이라고 표현하면서, 두 입장이 모두 하나님을 '영원한 현재' 혹은 '미래가 없는 현재'로 해명하고 있을 뿐, '미래', '부활', '종말', '희망'에 대해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어서요. 반대로, 바르트 역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출간되었을 때 "몰트만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에 세례를 주려 하고 있다."며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했고요. 예전에 장신대 김명용 교수님의 [칼 바르트의 신학]이라는 책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희망의 신학'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하고자 한 시도를 본 기억은 있습니다만, '희망'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둘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저로서는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3)"미래가 현재로 침투해들어온다."라는 표현은 신론 자체에 대한 이론적 고민으로부터 나온 주장이라기보다는, 당대의 구약성서 연구와 종교학적 연구 성과 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가령, 몰트만은 고대 근동의 '에피파니 종교'와 유대-그리스도교를 비교하면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언제나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하거든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고 약속하며 자기를 계시하였고, 모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며 자기를 계시하였고, 다윗에게는 '영원한 나라'를 약속하며 자기를 계시하는 등, 언제나 무엇인가를 '약속'하고, 인간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희망'하도록 하고, 그 희망에 근거하여 인간이 현재의 부정의와 맞서 싸우도록 자극한다는 거죠. 이게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와는 크게 구별되는 유대-그리스도교의 특징인 거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미래에 대한 약속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이 새로운 길을 가도록 자극한다는 주장이 "미래가 현재로 침투해들어온다."라는 식으로 몰트만에게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 @theologytoday
      @theologytoday  5 ปีที่แล้ว +6

      안녕하세요!ㅎ 좋은 질문 친절히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본 영상 시리즈는 (ivp) 책 내용을 충실히 요약-전달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1.판넨베르크를 희망의 신학 계열로 분류하는 문제
      이 책의 저자들도 판넨베르크 스스로는 “희망의 신학”으로 분류되기를 싫어했을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다만, 몰트만과의 교류가 있었던 점, 종말론과 미래에 대한 지향성을 강조한 점 등을 보면 “희망의 신학” 계열의 학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게 이 책의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2.바르트 신학의 자취
      과거 바르트 신학 수업을 들을 당시, 몰트만의 “삼위일체 신학”이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개념이 바르트에서 예비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몰트만이 이를 발전시켰다고 교수님께서 설명해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바르트 신학이 곧장 희망의 신학으로 연결되었다기 보다는, 몰트만 신학의 토대가 되는 변증법적 신학 방법론과 삼위일체 신학의 신학적 원천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바르트 신학에서 자취를 발견했다”고 이 책의 저자는 표현한 것 같습니다. 몰트만이 바르트를 수용하는 한 편, 비판함을 통해 극복하려 시도했다고 볼 수 있을듯합니다.
      3.미래 하나님 개념
      말씀하신대로 몰트만은 20세기 성서학의 성과 (종말론의 재발견)를 수용해 “약속” 개념을 근거로 “미래의 하나님” 개념을 발전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는 다음 편 영상에서 다룰 내용이기도 하구요. 다만, 성서학 만이 몰트만의 신론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종말론적 존재론, 이반트의 화해의 변증법 등의 영향 역시 몰트만의 신론을 구축하는데 주요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 @lucasmonogenes7857
    @lucasmonogenes7857 4 ปีที่แล้ว +1

    전도사님 조직신학은 교리를 다루는데 왜 교리신학이라 안하고 조직신학이라고 하나요?

    • @theologytoday
      @theologytoday  4 ปีที่แล้ว

      조직신학은 systematic theology 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체계적-종합적-이론적으로 분석하는 신학 분과를 의미합니다. 조직신학 내에 교의학, 윤리학, 변증학 등이 포함될 수 있다고 하네요! 전통적으로는 교의학을 의미하며, 지금도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ㅎ
      naver.me/F3rQRiYG

  • @눈빛바다
    @눈빛바다 5 ปีที่แล้ว

    밝고 희망찬 종말론~~ 세상이 어수선하면 늘 등장하는 종말론 ~~ 우리 조심해요. 내가 먼저 주님께 갈듯혀요.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직선을 초월한거 아닌가요.~~ 광고 4편 끝까지 보고갑니다.13분 ㅋㅋ 천재 1명이 출현해서 다 정리해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