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명한 사실은 그 마음과 정신을 알아준 수백명의 사람들이 선생을 기렸다는 것이죠.. 그 삶의 과정은 고될지언정 결과적으로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시대에나.. 옳은말하면 배척 당하는 건 사실이지만은 그 의식과 증명에 큰 행복과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매주 토요일 아이 수업 데려다주며 보는 형평사탑 정말 신분때문에 배우지못하고 차별받았던 그시절을 아이와 함께 이야기 하니 참 좋습니다 진주시민이 된지 2년 조금 넘은 우리가족 아기자기 참 예쁜 도시라는걸 느낍니다 대도시에선 느낄수 없는 어떤 평온함이 있는ㅎㅎ 얼마나 살다 이곳을 떠날진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길수 있었음 좋겠네요^^
역사는 반복됨. 항상 역사는 예민함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감. 시민혁명이 그랬고, 투표권 부여도 그랬고, 인종 차별도 그러고 페미니즘도 다 같은 맥락임. 항상 사상에 예민하고, 진취적인 사람들은 일반 보통 대다수로부터 무시받음. 현재도 다르지 않음. 다른 생각에 대해 너무 예민하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 역사의 발전을 막는 놈팽이라는 걸 스스로 반증하는 거. 반성하고 감.
주민들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험한 일을 해야하고, 누군가가 생선을 먹기 위해서라면 다른 누군가는 또 생선을 잡고 처리를 해야한다... 세상 모든 3D잡이 그런 부류라고 생각한다. 내가 외국에서 15년 살며 느낀건, 그 힘들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기술을 가졌을 때 저니맨이라던지 스킬 워커라며 높이 사주고 돈도 많이 버는 모습과 문화인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런 모습이 사라지진 않는다... 아쉽고 안타깝다...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조선시대 백정은 대부분 북방 소수민족이었다고 합니다. 백정(白丁)이란 어원 자체가 호적(丁)에 들지 못한(白)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외국인 선교사가 쓴 기록에서 묘사된 백정의 생김새를 보면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때문에 과거 백정에 대한 차별은 단순히 직업적인 차별이 아닌 인종차별에 가까운 것이 었다고 생각합니다. ps.아이러니하게 조선의 첫번째 왕 이성계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4대조 위의 증조부가 거란, 말갈족으로 추측됨
백정은 고려시대 직역이 주어지지 않은 농민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이 세워지고 세종대왕께서 도축업자와 같은 천인의 차별을 없애고자, 이들에게도 백정이라는 이름을 허락하셨는데. 기존의 농민들이 반발하며 오히려 백정이라는 호칭을 거부하면서 도축업자를 백정이라고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우기로는 이러했는데, 여러 학설이 있는 모양이네요.
동영상 잘 보았습니다.오늘 형평운동기념탑과 강상호 선생님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진주를 방문하면 꼭 방문해야할 곳이 아닌가 싶네요~ 강상호 선생님의 묘소에 풀이 난무하게 많이 자란 것을 바라보며, 더욱 이 분의 삶을 닮아가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네요^ 또한 최근 넷플렉스에서 방영하는 김장하선생님께서 강상호 선생님 묘지 비석을 세우셨다는 사실이 더더욱 존경하게 되네요
우리에게도 이런 차별이 있었다는 것에 새삼 알게 되었고, 교과서에서 흑인들이 차별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운 얘기들을 미담처럼 배워 왔는데, 우리 역사도 이런 알려지지 않은 많은 분들이 피땀으로 쌓아올린 인권 평등 자유 등의 가치를 지금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것이겠지요. 진정 약한자 힘없는자 핍박받는 자의 위치에 있던 분이네요. 지금 우리의 일상에도 이런 부당한 차별들이 있지는 않나요. 실력이 아니라 지위로, 나이로, 깎아내리는 조직이 있지는 않나. 강상호 선생님,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항상 이런 사건들을 보고 있으면 씁쓸함이 느껴집니다. 강상호 위인이 아주 깨어있는 행동을 하셨지만, 그분이 양반 신분이 아닌 백정 신분이었다면 조금이라도 변화의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요? 드라마에서 흔히 쓰이는 클리셰 중 하나가 생각납니다. 가난한 집 딸인 주인공이 갑질을 당할 때 그 상황을 이겨내는건 주인공의 행동이 아니라 주인공의 친엄마가 알고보니 재벌이어서 상황을 해결하죠. 지위가 높은 누군가가 조력자로 있어야지만 낮은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 가능성이 겨우 생긴다는 것이 참 애석합니다. 꼬리를 무는 아이러니이기도 하고요.
조선 말기 사대부들의 횡포는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서구 또는 중국의 어느나라도 망할때는 매 한가지죠.... 백정 탄압을 예을 들며 조선에 대해 형편없는 나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세 유럽이나 어디에서나 있었던 일이죠.. 조선은 힘없고 가난했던 이유는 사대부의 생각이 깨지 못해서지.... 백성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단지 백정만을 그렇게 좋지않게 봤던건 조선엔 그래도 생명중시 사상이 있지 않았나 봅니다.
형평운동은 당시 일본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수평운동은 일본의 전통시대 천민이었고 차별을 받고 있는 부락민(부락민)을 동등한 인식으로 보자는 운동입니다. 결과는 현재 한국은 백정에 대한 차별 인식 완전 사라진 반면, 일본은 아직도 많이 그것도 대놓고 남아 있습니다.
백정에 대해서는 신분차별이라기 보다, 직업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동물을 죽이고, 칼로 그 살점을 자르는 잔인한 일을 하는 사람은, 사람도 죽일수도 있다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지요. 즉 잔인한 일을 했던 사람들을 기피했던 정서입니다. 꽃집 아가씨와 백정 아가씨,,,당신은 누구를 더 선호하나요? 지금이야 그저 기호일뿐이겠지만, 당시 조선처럼 살생을 혐오하는 문화 속에서 백정은 뭔가 일반인들과 분리되어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던 것이죠.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승동교회는 신도수가 16명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교회였다. 이처럼 작았던 승동교회가 한국교회의 역사와 근현대사에 빠질 수 없게 된 것은 사무옐 무어가 사람으로도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천민이었던 백정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으로 신분제 철폐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아버지를 위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치료비가 없던 박성춘을 치료해 줄 의사가 한 명도 없었다. 박봉출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을 백정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던 무어 목사를 찾아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신분제에 구애받지 않던 무어 목사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울며 매달리는 박봉출의 정성에 감동하여 당시 고종의 주치의로 있던 에비슨을 찾아가 박성춘을 치료해 주기를 부탁했다. 무어 목사의 간절한 부탁과 박봉출의 효심에 감동한 에비슨은 의료 가방을 가지고 냄새나고 누추한 박성춘의 집을 직접 찾아가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에비슨의 치료를 받아 살아난 박성춘은 자신을 인간으로 봐주고 생명을 살려준 무어 목사와 에비슨에게 깊은 감등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 백정이던 박성춘과 그의 자녀들이 승동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자 승동교회를 다니던 양반 출신의 신자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정을 교회에 받아들이지 말 것을 무어 목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며,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날 수 있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백정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양반 출신의 신도들은 교회를 떠나 홍문수골교회를 새로 세웠고, 승동교회의 교세는 점차 약해져 갔다. 박성춘은 자신을 살리고 교회식구로 받아들인 일로 어려음을 겪는 교회를 위해 주변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다. 그 결과 많은 백정들이 승동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승동교회를 백정 교회라 볼렀고, 교회는 늘어난 신자로 다시 교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두 교회는 다시 합쳐 1905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교회 건물을 세우게 된다. 그 후 박성춘은 1911년 백정으로는 처음으로 장로가 되어 500년 간 이어져 온 신분제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생사의 기로에 있던 박성춘을 살린 아들 박봉출은 에비슨이 콜레라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서양의학의 효과를 보고 의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이를 눈치 챈 에비슨은 영민하고 의지가 매우 강한 아이였던 박봉출에게 서양의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에비슨의 도움으로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병원)에서 8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박봉출(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이후 박서양으로 개명한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 일곱 명 중에 한 명이 된다. 이후 박봉출은 배움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 간도에 숭신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참여하여 군의관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처럼 승동교회는 박성춘을 통해 백정을 차별하는 사회적 인식이 잘못임을 실천을 통해 알렸다. 박봉출을 통해서는 백정도 이 나라의 어엿한 국민으로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백정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필요하며, 지금보다 나은 세상올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승동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특별함을 갖고 있다. 〈유정호,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브런치북 『족집게 한국사』, brunch. co. kr/@u84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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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데없지만 몰랐다면 너무 안타까웠을 사실들. 하루빨리 시즌 4가 나와서 더 많은 쓸데없는 사실들을 널리 알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쓸데없지만 알아야했고 알아야할 일들...
자신의 마음가짐에 녹여낸다면 쓸모없진 않은 않을까 싶네요
나올수 있을까?
개인의인성과 사회문화를 이루는 지식
가장필요한 산소 그리고 물과 같은것
아.. 정말 좋은 프로입니다.
강상호선생님. 처음 알았어요.
어딘가에 이런분이 꼭 계시는구나.
강상호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이런 분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네요~
안뇽
왜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배척당하는가. 현실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음...의견이 쎄다며...그냥그냥 의견없이 묻어가면 인싸될 수 있는 현실..자식에게는 어떻게 살라거 해야할까요?
어려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명한 사실은 그 마음과 정신을 알아준 수백명의 사람들이 선생을 기렸다는 것이죠.. 그 삶의 과정은 고될지언정
결과적으로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시대에나.. 옳은말하면 배척 당하는 건 사실이지만은 그 의식과 증명에 큰 행복과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교과서에서 형평사는 다루면서 강상호 선생님을 안다룬다는게 얼마나 아이러니인지.....
집단,단체보다 개인의 역사를 가치있게 보는 시민의식이 넓어질수록 우리의 역사의 관점도 달리질거라믿습니다.곧 님같은분들 관심과의식이 거름입니다.
얼마 전에 형평 운동 배운 고1인데 그 당시에 여러가지 사회 운동들이 많아서(국채보상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등등) 형평사 운동들을 제한된 시간 내에 자세히 배우기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고혁준-w3u ㄴㄴ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임
@@Orca88888 그렇게 치면 김원봉도 안 배우죠
@@고혁준-w3u 역사에 해박한 참 똑똑한 학생이네요. 더 많이 배워서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학생이 되길 바랍니다.
강상호님 정말 앎이 살아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신분이시네요.
- 새메시지 > 앎으로 가는 계단> 중에서.
참 알쓸신잡, 좋은 프로그램.
감사합니다
모른척해도 아무일도 없었을 텐데 인생을 걸고 옳은일을 할 수 있다니. 깊은 감동을 준다.
아직도 너무 모르는 역사적으로 좋은분들이 많네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시즌4 꼭 보고싶습니다
나피디님..보고있죠? 다른 예능만 하시지말구....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두르세요
사회운동가 강상호 선생님을 잊지않겠습니다
부모의 신분에 따라 자식위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에서,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자식의 경제력이 결정되는 사회로 바뀌었네요.
자본주의 사회닌깐요 ㅠㅠ자본이 신분이 된 사회.형태만 달라졌을뿐 본질은그대로. 사람차별은 진행형이네요
와.. 양반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런거죠,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제는 대부분의 양반이 천민,백정,상놈이라고 인간취급을 안함
같은 천민,상놈끼리도 백정이나 노비들은 무시했으니 말다했지
조선은 더 빨리 망했어야했음
@@sgstardust 그당시 다른나라는 달랐을거같냐? ㅋㅋ
@@sgstardust 19세기 세계각국 사람들을 잡아다 인간 동물원을 만들고
쓸모없어진 노예는 인육으로 먹은 유럽이 할 말은 아니지...
누군가는 꼭 해야 될 가장 힘든일을 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은 항상 차별해왔다
조금은 나아졌지만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나아가고 있고
우리들도 그러할 것이다
매주 토요일 아이 수업 데려다주며 보는 형평사탑
정말 신분때문에 배우지못하고 차별받았던 그시절을 아이와 함께 이야기 하니 참 좋습니다
진주시민이 된지 2년 조금 넘은 우리가족
아기자기 참 예쁜 도시라는걸 느낍니다
대도시에선 느낄수 없는 어떤 평온함이 있는ㅎㅎ
얼마나 살다 이곳을 떠날진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길수 있었음 좋겠네요^^
100년이 넘은 이 시점에 강상호 선생의 그 염원이 완전히 이루어졌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차별들이 존재하니까요
정말 놀랬었고 감동적이었으며 슬픈 내용이었습니다.세상엔 가끔 천사들이 존재한다는 걸 이런 분들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혹시 나도 내 안에 편견과 차별 의식이 있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가슴 먹먹한 내용이었습니다.유익한 프로였어요.곧 다시 만나시길..^^
정말 좋은내용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알게되서 좋네요 :)
강상호 선생님......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ㅠ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형평운동에 헌신하신 강상호 선생님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네요 이런 분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너무 멋진 분이네요. 너무 가슴 아프고 또 아름다운 이야기에요
강상호 선생님 영화 나왔으면 좋겠어요. 매우 상징적인데..
형평사..와우 대단하네요..강상호 정말 존경스런 분이 있었군여..이런 분의 희생이 그래도 형평하고 아름다운 오늘의 세상이 됐네요...감사합니다
역사는 반복됨. 항상 역사는 예민함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감. 시민혁명이 그랬고, 투표권 부여도 그랬고, 인종 차별도 그러고 페미니즘도 다 같은 맥락임.
항상 사상에 예민하고, 진취적인 사람들은 일반 보통 대다수로부터 무시받음. 현재도 다르지 않음. 다른 생각에 대해 너무 예민하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 역사의 발전을 막는 놈팽이라는 걸 스스로 반증하는 거.
반성하고 감.
작가님~ 정리를 정말 잘 해주세요~ 그대로 우리 아이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와 진짜 좋은 사실 알고 갑니다!
"부모님이 누구냐에 따라서 신분이 결정되는 그런 세상이 다시 와서는 안 된다."
언제나 마이너리티는 배척받아왔습니다. 오늘날의 마이너리티가 무엇이고, 어떤 게 정의인지 생각하면서 살겠습니다.
눈물이 나네요
이런 분을 우리가 몰랐다니 ㅠㅠ
발굴 및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역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 한잔씩 떠놓고 이런 귀한 대화를..
올해가 형평운동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국립진주박물관 형평운동특별전시에서 강상호라는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등을 위해 평생을 노력한 진정한 선구자 강상호, 기억하겠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정말 일 잘하더라구요. 임진왜란/병자호란이나 조선시대 화기를 다룬 영상들 수준이 후덜덜….
보는 내내 눈물이 펑펑 ㅠ
지식인의 참된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함
다양하고 알찬 이야기들! 감사합니다
제가 사는 곳이 진주시 가좌동이라서,
매일 버스타고 가면서 보이는 형평운동가 강상호씨 묘지라는 안내판을 보면서, 형평운동가가 뭐지? 라는 의문만 있고 찾아보진 않았는데 이런 운동을 하신 분이셨군요 !!
주민들이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험한 일을 해야하고, 누군가가 생선을 먹기 위해서라면 다른 누군가는 또 생선을 잡고 처리를 해야한다... 세상 모든 3D잡이 그런 부류라고 생각한다. 내가 외국에서 15년 살며 느낀건, 그 힘들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기술을 가졌을 때 저니맨이라던지 스킬 워커라며 높이 사주고 돈도 많이 버는 모습과 문화인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런 모습이 사라지진 않는다... 아쉽고 안타깝다...
이학찬이 나올줄알았는데 훌륭하신분이잇엇군요
아직도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음
차별을 혁파하기 위해 힘쓴 사람들은 정말 위대한 거 같아요
그리운 유시민 선생님.
당신께서는 대한민국의 스승 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좋은 가르침 ... 주시기 바랍니다.
이 영상을 보면서 유시민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 봅니다.
강상호, 기억하겠습니다.
형평사가... 끝이 좀 안타까웠죠. 대학에서 강의듣고 과제로 형평사에 대한 레포트를 제출해야해서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했는데 참... 약간 씁쓸했던
참 좋다
감사하네요
참모진세상사신 분들 다 평온하소서
저런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닐까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조선시대 백정은 대부분 북방 소수민족이었다고 합니다.
백정(白丁)이란 어원 자체가 호적(丁)에 들지 못한(白)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외국인 선교사가 쓴 기록에서 묘사된 백정의 생김새를 보면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때문에 과거 백정에 대한 차별은 단순히 직업적인 차별이 아닌 인종차별에 가까운 것이 었다고 생각합니다.
ps.아이러니하게 조선의 첫번째 왕 이성계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4대조 위의 증조부가 거란, 말갈족으로 추측됨
백정은 고려시대 직역이 주어지지 않은 농민을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이 세워지고 세종대왕께서 도축업자와 같은 천인의 차별을 없애고자, 이들에게도 백정이라는 이름을 허락하셨는데. 기존의 농민들이 반발하며 오히려 백정이라는 호칭을 거부하면서 도축업자를 백정이라고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우기로는 이러했는데, 여러 학설이 있는 모양이네요.
머..멋지다 강상호
동영상 잘 보았습니다.오늘 형평운동기념탑과 강상호 선생님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진주를 방문하면 꼭 방문해야할 곳이 아닌가 싶네요~
강상호 선생님의 묘소에 풀이 난무하게 많이 자란 것을 바라보며, 더욱 이 분의 삶을 닮아가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네요^
또한 최근 넷플렉스에서 방영하는 김장하선생님께서 강상호 선생님 묘지 비석을 세우셨다는 사실이 더더욱 존경하게 되네요
지금은 고소득 기술직....
역사교육이 이야기가 되어야하는 이유다. 물론 연도 이름 등의 데이타를 얻는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속의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어야한다
하.. 직업에 귀천이 어디있다고 ㅜ지들은 고기 안먹나 ㅡㅡ 마지막에 강상호 선생님 장례라도 성대하게 치뤄줘서 다행이네요
우리에게도 이런 차별이 있었다는 것에 새삼 알게 되었고, 교과서에서 흑인들이 차별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운 얘기들을 미담처럼 배워 왔는데, 우리 역사도 이런 알려지지 않은 많은 분들이 피땀으로 쌓아올린 인권 평등 자유 등의 가치를 지금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것이겠지요. 진정 약한자 힘없는자 핍박받는 자의 위치에 있던 분이네요. 지금 우리의 일상에도 이런 부당한 차별들이 있지는 않나요. 실력이 아니라 지위로, 나이로, 깎아내리는 조직이 있지는 않나. 강상호 선생님,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영원히 길이길이 남을 프로그램입니다.
그들의 역할로 인해 본인들이 이로움을 받으면서 차별을하니, 이런 편협함을 버려야 사회가 발전함.
모난 돌은 정 맞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만이 세상을 바꾼다. 반론 없는 논의는 논의로서의 가치가 없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수 있는데 왜 그랬던걸까,,, 하지만 차별이 심한 와중에도 어떤사람은 존중해주고 챙겨줬겠지
형평사와 강상호 선생님에 대해서는 알아둬야겠다.. 처음 알았음
진주의 어른 김장하 선생님 다큐를 보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이런 훌륭한분의 쓸쓸한 죽음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어느정도 평등해진 사회에 살수 있다는 감명에 눈물이 납니다
저렇게 해결이 하나둘씩 안되었으면 지금 인도 카스트제도처럼 계급이 남아있었겠네...
알아두면 쓸데있는..
아니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네요 오늘은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끼리끼리 결혼시키고. 인맥 쌓고 10대들의 꿈이 건물주라잖아요.
지금 마장동 사장님 알부자 ㅎㄷㄷ
이분에 대한 드라마나 영화가 제작되었으면
안타깝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신분제이죠.아버지가 금수저면 나도 금수저. 아버지가 흙수저면 평생 흙수저
아버지가누구냐에 따라서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가 다시온거같은데...ㅋ
장자크루소? 마틴루터킹? 마! 우리는 강상호 선생님이 계셨다 임마!
위로부터의 차별은 싫어하던 중인 상인 평민들이 또 다른 차별을 하던 모순.
아직도 현재 대한민국에 존재하죠.
이것은 인간의 특성인가요. 남들과 다름을 존중하는것이 아닌 차별,틀림이라 여기는 한국인들의 특성인가요.
와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우리할머니 1940대년생인데도 할머니 말씀 들어보면 어렸을 때 할머니의 엄마가 백정이랑은 절대 말도 섞지 말고 옷깃도 스치면 안되며 만약에 말 섞을 일 생기더라도 절대 존대하지 말라고 했다고 함.
항상 이런 사건들을 보고 있으면 씁쓸함이 느껴집니다. 강상호 위인이 아주 깨어있는 행동을 하셨지만, 그분이 양반 신분이 아닌 백정 신분이었다면 조금이라도 변화의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요? 드라마에서 흔히 쓰이는 클리셰 중 하나가 생각납니다. 가난한 집 딸인 주인공이 갑질을 당할 때 그 상황을 이겨내는건 주인공의 행동이 아니라 주인공의 친엄마가 알고보니 재벌이어서 상황을 해결하죠. 지위가 높은 누군가가 조력자로 있어야지만 낮은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 가능성이 겨우 생긴다는 것이 참 애석합니다. 꼬리를 무는 아이러니이기도 하고요.
조선 말기 사대부들의 횡포는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서구 또는 중국의 어느나라도 망할때는 매 한가지죠....
백정 탄압을 예을 들며 조선에 대해 형편없는 나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세 유럽이나 어디에서나 있었던 일이죠..
조선은 힘없고 가난했던 이유는 사대부의 생각이 깨지 못해서지.... 백성이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단지 백정만을 그렇게 좋지않게 봤던건 조선엔 그래도 생명중시 사상이 있지 않았나 봅니다.
이런 얘기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네요
휼륭한 분인데 배운 적이 었으니 안타깝네요
형평운동은 당시 일본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수평운동은 일본의 전통시대 천민이었고 차별을 받고 있는 부락민(부락민)을 동등한 인식으로 보자는 운동입니다. 결과는 현재 한국은 백정에 대한 차별 인식 완전 사라진 반면, 일본은 아직도 많이 그것도 대놓고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의 양반이엇으면 그냥 자기의 권리를 누리면서 편하게 살수있었을텐데 백정들을 위해서 발벗고 나섯다는게 진짜 존경스럽네요
정말 궁금한건데, 예수님이 가장 가난하고 차별받는 자들을 사랑하라고 했고 얼마나 얘기했으면 무신론자인 저까지 아는데 왜 정작 신도라는 사람들이 따르질 않는 건가요??
왜 이렇게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 믿기 편한 방향으로 믿는 건가요??
원래 있던 형평탑은 정말 큰걸로 기억하는데. 이전했다더니 작아진거같네
맞습니다. 정글러 혐오를 멈춰주세요.
요즘은 신분제로 다시 돌아가는 중
현재라고 다를까요 ..
법제는 바뀌지만 인간의 의식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차별의식은 여전히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법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정신까지 세뇌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백정에 대해서는 신분차별이라기 보다, 직업차별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동물을 죽이고, 칼로 그 살점을 자르는 잔인한 일을 하는 사람은, 사람도 죽일수도 있다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지요. 즉 잔인한 일을 했던 사람들을 기피했던 정서입니다.
꽃집 아가씨와 백정 아가씨,,,당신은 누구를 더 선호하나요? 지금이야 그저 기호일뿐이겠지만, 당시 조선처럼 살생을 혐오하는 문화 속에서 백정은 뭔가 일반인들과 분리되어야 할 사람들로 여겨졌던 것이죠.
혐오와 차별은 어떤이유로든 합리화될수없다
이세상에 차별받아도 될 백정은 리그 오브 레전드의 백정 뿐이다
백정들 일화를 주욱 보자면 고깃국, 고기반찬은 그리 귀한 것이였는데 그 귀한 고기를 만드는 백정들을 그렇게 차별했던게 이해가 잘 안가긴함
ㅇ ㅇ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뭐....
될.놈.될세상...
지구가 어여 사.라.졌.으면 좋겠다...
배패시급!!!!)!
마장동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결혼 파토낸 사람들도 60~80년대 즐비했다고 함....
인간이 얼마나 많은 동식물들을 멸종 시켰을까? 생존이 아닌 그저 즐기기 위해서. 차별 당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미지의 죽음만이 인간을 멈추게 해준다. 인간으로서의 대가를 치뤄야한다.
오..
사실 이해는 안됐었는데
백정은 꼭 있어야하는 중요한 직업, 심지어 인생에서 안 마주치기 힘든 직업인데 어떻게 왜 그리 백정을 싫어했을까 했는데 백정들은 보통 외국인이었던거 같더라고요
저야 말로 신백정이네요 아버지에 의해 신분-재산이 결정이 된 영상 말미에 나온 그런세상 지금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다만 노력에 의해 바뀔수 있는 여지가 아주작게 있다는 것 정도 가 조선시대와 차이가 있겠네요
요즘에도 휴거지랑은 못 놀게 하는 부모고 있고 학군 다르게 배정해 달라는 부모도 있고...역사는 반복됩니다.
휴거지라...별 말같지도 않은 말
근데 지금은 신분제 사회라는 거다
현재도 어머니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서 차별받는 세상인데~~ 이런 세상이 다시 오면 안된다가 아니라 현재도 일어나고있으니 너도 이런 불합리를 타파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으면 좋았을텐데요ㅎㅎ
백정이 원래는 일반 평민백성을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어느나란가 기억안나는데 다른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유민들이 들어와서 주로 도축업을 도맡아하면서 일반 백성들이 그들과 구분을하려고하면서 백정이란 이름이 도축업자로 굳어지고 천한사람으로 여겨졌다고 어디서 배웠는데
그러고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 대단하면서도 같잖고 모순적이야. 그렇게 차별받기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은 또 차별을 서슴지 않아.
저도 소 키운다고 하면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네요 ㅋㅋ
교과서에 실릴 분이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이를 기름지게 배불리 먹일 수 있으니 이 같은 자가 예수말고 달리 또 누구랴...
흑 나 왜 우냐..
백정들이 예배당으로 쭈뼛쭈뼛 들어갔는데 다른 신도들이 예배당을 떠났다는 내용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94년생이지만 이야기들어보면 70년대까지만해도 지방 작은규모 도축업자들은 백정이라고 깔봤다 들었음
놀라운 사실: 미국의 노예제도가 조선의 노비제도 보다 백년은 먼저 폐지됨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승동교회는 신도수가 16명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교회였다.
이처럼 작았던 승동교회가 한국교회의 역사와 근현대사에 빠질 수 없게 된 것은 사무옐 무어가 사람으로도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천민이었던 백정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으로 신분제 철폐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아버지를 위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치료비가 없던 박성춘을 치료해 줄 의사가 한 명도 없었다.
박봉출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자신을 백정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던 무어 목사를 찾아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신분제에 구애받지 않던 무어 목사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울며 매달리는 박봉출의 정성에 감동하여 당시 고종의 주치의로 있던 에비슨을 찾아가 박성춘을 치료해 주기를 부탁했다.
무어 목사의 간절한 부탁과 박봉출의 효심에 감동한 에비슨은 의료 가방을 가지고 냄새나고 누추한 박성춘의 집을 직접 찾아가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에비슨의 치료를 받아 살아난 박성춘은 자신을 인간으로 봐주고 생명을 살려준 무어 목사와 에비슨에게 깊은 감등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
백정이던 박성춘과 그의 자녀들이 승동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자 승동교회를 다니던 양반 출신의 신자들이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백정을 교회에 받아들이지 말 것을 무어 목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며,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날 수 있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백정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양반 출신의 신도들은 교회를 떠나 홍문수골교회를 새로 세웠고, 승동교회의 교세는 점차 약해져 갔다.
박성춘은 자신을 살리고 교회식구로 받아들인 일로 어려음을 겪는 교회를 위해 주변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다.
그 결과 많은 백정들이 승동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승동교회를 백정 교회라 볼렀고, 교회는 늘어난 신자로 다시 교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두 교회는 다시 합쳐 1905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교회 건물을 세우게 된다.
그 후 박성춘은 1911년 백정으로는 처음으로 장로가 되어 500년 간 이어져 온 신분제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생사의 기로에 있던 박성춘을 살린 아들 박봉출은 에비슨이 콜레라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서양의학의 효과를 보고 의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이를 눈치 챈 에비슨은 영민하고 의지가 매우 강한 아이였던 박봉출에게 서양의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에비슨의 도움으로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병원)에서 8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박봉출(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이후 박서양으로 개명한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사 일곱 명 중에 한 명이 된다.
이후 박봉출은 배움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 간도에 숭신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참여하여 군의관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처럼 승동교회는 박성춘을 통해 백정을 차별하는 사회적 인식이 잘못임을 실천을 통해 알렸다. 박봉출을 통해서는 백정도 이 나라의 어엿한 국민으로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백정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회에 필요하며, 지금보다 나은 세상올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승동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특별함을 갖고 있다.
〈유정호, “백정 교회라 불리던 승동교회”, 브런치북 『족집게 한국사』, brunch. co. kr/@u842/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