ความคิดเห็น •

  • @ineskim1657
    @ineskim1657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3

    신희권교수님 업적도 대단하시고 얘기도 넘 재미있게 잘 하시네요 😊😊 차고 넘칠 것 같아요. 영상 더 많이 만들어주세요 ㅎㅎ

  • @user-go9eb1om5g
    @user-go9eb1om5g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55

    심용환 학자님과 신희권 교수님의
    티키타카도 좋았고 내용도 훌륭해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정독했습니다. 두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두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user-qi5oh7hd6t
    @user-qi5oh7hd6t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41

    '80년대 중반 고딩 때 받았던 사회과부도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여기 서울 지도에 풍납토성 일대가 '윗바람드리'로 표기되어 있네요. 한강 개발도 필요했겠지만, 보존이 너무 아쉽습니다..

  • @user-nw1be9yj2j
    @user-nw1be9yj2j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6

    다음 이야기 기대되네요.

  • @eugenehwang808
    @eugenehwang808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6

    풍납토성은 현재 아파트 단지들이 워낙 많이 들어서 있어서 발굴 및 복원하기도 쉽지 않다는 게 참 안타깝네...
    그리고 수많은 고분군들도 도시개발로 다 파괴되고 소실된 게 너무나도 많던데...
    그래서 한성백제 시절의 왕릉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지...
    그나마 석촌동 고분군에 3호분을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만 할 뿐이고...
    서울이 백제의 500년 수도였다고는 하나 고작 100~200년 밖에 안되는 공주, 부여에 비해서 유물, 유적지들이 부족한 건 너무 안타까움...
    그래서 공주, 부여, 심지어 익산까지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인정받는데 비해 한성백제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도 그렇고...

  • @user-qi5oh7hd6t
    @user-qi5oh7hd6t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1

    마침 다산 선생 출생지가 팔당 두물머리 근처이니, 한양으로 왔다 갔다 하시면서 위례성 유적지를 많이 보셨을 것도 같네요..

  • @semoligic
    @semoligic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신희권 교수님 대단하시네요 ㅋㅋ 다음 출연 기다릴께요!

  • @user-vr5zd7cj3w
    @user-vr5zd7cj3w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6

    아끼고 또 아껴서 듣고 싶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꾸벅꾸벅
    두분 모두 건강하시는 한해 되시길♡

  • @Jjanguagimae
    @Jjanguagimae 3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완전 재밌게 봤습니다.👍

  • @johnwhite4179
    @johnwhite4179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4

    서울 특히 사대문 안의 고층 빌딩들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사라졌을지... 사대문안이 옛모습으로 남아있고, 그 밖이 지금의 현대적 모습이었으면 전세계적으로 유니크한 도시가 됐을텐데 말이죠.

  • @user-my6ie6hq4i
    @user-my6ie6hq4i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4

    고구려의 국내성 환도산성을 보면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다. 허허벌판에 무슨 왕성이라니~

  • @jeoniruka
    @jeoniruka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너무 재밌어요 ㅎㅎㅎ

  • @user-dq2mz9og6b
    @user-dq2mz9og6b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9

    아마 지금도 공사하면서 대충 깨부수고 파묻히는 유적과 문화재들이 제법 될 것 같네요 ㅠㅠ

  • @urang-urang
    @urang-urang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9

    신희권 교수님 너무 좋아요! 백제 이야기 더 많이 해주세요!🎉😊

  • @wg6531
    @wg6531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5

    넘 재미남 ㅎㅎㅎㅎ

  • @user-wq7fw4lb2m
    @user-wq7fw4lb2m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1

    삽질에 뿌듯함이 묻어나는 신희권 교수님의
    발로뛰는 역사이야기 듣고있는데 제 가슴이
    다 뛰네요..심용환님과 함께 그동안
    해오신 발굴 복원 비하인드스토리 다 풀어내
    주세요 현장감이 살아있는 역사란 바로 이런것이죠😊😊

  • @user-rj2ui6bk3i
    @user-rj2ui6bk3i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생각의발상
    넘좋아요

  • @msoh3075
    @msoh3075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오늘 영상 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신희권 교수님 새로운 스타 탄생 이가요? 자주 나오시면 좋겠네요 ^^
    두 분 수고 많으셨고,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edit - 스타탄생 이신

  • @odissibeena
    @odissibeena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4

    너무너무 재밌어요. 꼭 더 알고 싶으니 계속해서 시리즈 만들어주세요!!

  • @user-lq6mq5lz3q
    @user-lq6mq5lz3q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9

    하남 강동쪽 살아서 그런지 더 재미있게 들었어요!! 교수님 이야기 시간가는 줄 모르겠네요 숭례문 이야기도 기대할게요!!

  • @user-we9lt1ml6v
    @user-we9lt1ml6v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감사합니다..

  • @user-nc9wv7sf8i
    @user-nc9wv7sf8i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흥미진진합니다

  • @02loveu-gwon
    @02loveu-gwon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절대공감 합니다?👏👏💦

  • @user-oc1nt8xx6w
    @user-oc1nt8xx6w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와 잼있다 잼있어~~

  • @geobugi-
    @geobugi-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9

    위례성의 발굴역사 정말 재밌네요
    그럼 이병도 박사를 낚은(?) 춘궁리의 궁은 왜 들어갔을까 궁금해지네요ㅎㅎ

    • @American-drone
      @American-drone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거기가 남한산성 북쪽 사면이고 한강 남쪽이면서 금암산과 객산 두 산줄기로 둘러싸인 요충지 입니다. 객산 능선에 토성 흔적이 옛날부터 있었고 춘궁동 자리는 제법 널찍한 분지로서 그곳이 지역 전설엔 온조가 도읍한 궁터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직 발굴조사를 통해 뭐가 나온건 없지만 삼국사기 백제 초기 기록에 온조왕대 말갈의 침략을 자주 당했다고 나오는데 아마도 온조세력이 처음에는 고구려의 홀본 오녀산성이나 경주의 반월성처럼 춘궁동 분지를 천혜의 방어지로 여기고 초기 근거지로 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user-by6xz8eg3u
      @user-by6xz8eg3u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일단 학계에서 인정한 유물은 신라 상대와 중기 사이가 가장 이른 편인데, 최근 연구 중에 춘궁리 유적 성곽 일부에서 백제 것이 제일 밑에 있고 고구려 문화층과 신라 문화층 순으로 표토에 가깝게 쌓여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아주 연관성이 없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성곽은 궁촌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근처가 옛 광주 치소여서 관아가 있었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jieunlee261
    @jieunlee261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와 재밌네요.

  • @purple-..-
    @purple-..-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5

    경주를 다녀와서 신라는 정말 멋진 나라였구나란 생각을 했는데
    백제도 어떤 나라였을지 궁금해지네요. 다음편 기대할게요

  • @fnkxhdnbs
    @fnkxhdnbs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잼있네요

  • @AA-bf9vk
    @AA-bf9vk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8

    교수님 너무 재밌어요. 자주 나와주세요!❤

  • @user-ww1xm7sx6c
    @user-ww1xm7sx6c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5

    신희권교수님진짜너무재밋어요! 시간가는줄모르고보게되네요ㅋㅋㅋ

  • @user-fe5rd3ko8z
    @user-fe5rd3ko8z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7

    와...겁내 좋은 방송!
    진짜 돈내고 보라해도 볼 방송!

  • @user-mb1et1oy5t
    @user-mb1et1oy5t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4

    발견되서 정말 다행이네요! 재밌게 보고 갑니다!

  • @JungSungMock
    @JungSungMock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0

    그 풍납토성위에서 뛰어다니며 놇았는데 ㅋㅋ 유적발굴해본다고 땅도파고
    근데 리버빌아파트 발굴현장은 국민학교다닐때 등교하며 매일 봤는데 너무 대충한거 아닌가요? 그때 부모님들사이에 조합에서 돈좀 넉넉히 찔러넣었다는 후문이.......

  • @user-be4vq2io8d
    @user-be4vq2io8d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4

    고려시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이상 한강 남쪽 허허벌판에 풍납토성, 몽촌토성같은 거대한 성곽에 수많은 왕릉급 무덤들이 있는걸 보고 상식적으로 추정을 할수 있었을텐데
    김부식이나 다른 고려시대 역사가들은 어떤 의도로 삼국사기에 위례성의 위치를 모른다고 기록한건지 궁금하네요.
    당대에 백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축소시키거나 왜곡해야 할만한 다른 역사적, 정치적 이유 같은게 있었나요?

    • @user-gg2hf3vw1m
      @user-gg2hf3vw1m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0

      영상에서 빠진 이야기가 많은데, 요약해서 말하자면 고려시대에 한강변의 거대한 성곽들은 흙더미 위에 파묻혀서 성인줄도 몰랐고, 왕릉급 무덤들은 그냥 돌무더기나 언덕 정도로 봤기에 진짜 증거가 없어서 위례성의 위치를 몰랐다고 보는게 적절합니다. 간단하게 성곽, 무덤으로 나눠 설명해보겠습니다.
      성곽? 두 성 모두 토성입니다. 그런데 강남이란 땅이 한강이 폭우로 불어나면 강남을 덮칠 때마다 침수되는게 일상인 땅이죠? 그 때마다 한강이 상류에서 싣고 온 토사들이 강남을 뒤덮습니다. 그래서 강남의 드넓은 허허벌판이 만들어졌고요. 이를 감안할 때, 두 성 모두 버려진 뒤로는 홍수와 퇴적이 반복되며 위에 흙이 쌓이니까 언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풍납토성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성벽이 깎이기 전까지, 몽촌토성은 영상에 나온대로 올림픽공원을 만들기 위해 발굴조사하기 전까지 한강변의 언덕 A 정도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게 197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고지도입니다(국토지리정보원 사이트가면 공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지도들 성들은 정성껏 따로 표기를 해주는데 일대에 그 표기가 없습니다.
      무덤? 왕릉급의 큰 무덤은 '"이것이 '누군가'의 무덤이다" 라는 게 인지가 안되면 그냥 언덕이나 돌무더기에 불과합니다. 경주 대릉원도 발굴조사를 통해 무덤인 걸로 드러나기 전까진 애들이 뛰어노는 동산이었다 하지 않습니까?

    • @user-be4vq2io8d
      @user-be4vq2io8d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4

      @@user-gg2hf3vw1m 답변 감사드립니다. 강남쪽이 홍수가 빈번한 지역이었으니 성곽도 파묻혀 있었을 가능성도 있겠네요
      한가지 더 궁금한게 일제시대 조사에서 확인된 봉분만 293개라는 왕릉급 백제 고분군들도 그런식인걸까요? 일제시대에 측량이 가능할 정도면 고려시대에는 원형에 더 가까왓을텐데
      고구려의 왕도였던 국내성이나 평양성 고분군이나, 신라 경주의 고분군들은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어느정도 규모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걸 보면 잘 이해가 안되서요
      그에 비견될 정도의 꽤나 규모가 거대했던 백제 고분군들도 그런식으로 추정이 불가할 정도로 다 땅에 묻혀버려서 후대에 짐작도 할수 없었을거라고 볼수 있을까요?

    • @user-gg2hf3vw1m
      @user-gg2hf3vw1m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user-be4vq2io8d 그렇다고 봐야되겠지요.

    • @browncony900
      @browncony90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7

      백제의 위례성은 안타깝게도 삼국사기가 쓰여진 시점인 1145년을 기준으로 해도 버려진지 너무 오래된 성이었습니다.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패해 한성이 함락된 게 475년이니 이미 670여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버린 뒤였죠.
      오늘날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1350년대 고려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시대의 유적을 찾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고,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이후에도 동경으로 남아 고려의 역사와 함께한 서라벌과는 너무나도 오래 전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백제가 웅진, 사비로 천도한 후 위례성이 다시금 수도가 되지도 않았고, 재건되지도 않은 채 백제조차 멸망해버려서
      고려시대에 정확한 위치나 지명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이라 문자 그대로 '모른다'고 기록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당대 역사학자들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을 겁니다. 다만 그 심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당대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 @user-be4vq2io8d
      @user-be4vq2io8d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browncony900 답변 감사드립니다.
      당대의 사학자들도 위례성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을꺼라는 주장쪽이 더 타당성이 높아보이긴 하네요
      영상의 고고학자분께서는 100% 김부식의 의도가 있었을꺼라는 주장을 하셔서, 그렇다면 그 의도가 대체 뭘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구요
      삼국사기 작성 당시라고 해도 한성백제는 수백년전의 역사일텐데, 구지 김부식의 주관이나 의도가 개입되기엔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을꺼란 생각이 듭니다.

  • @jungjaejong7317
    @jungjaejong7317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이병도,신석호 같은 식민사학의 대부들을 박사님라고 칭하는 니들이 더큰 문제다

  • @user-jc4vu2gt7h
    @user-jc4vu2gt7h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5

    일본도 건드리지 않았던 왕릉급 무덤 280기를 도시개발한다고 밀어버렸다는 게... 당시 상황을 이해한다 해도 너무 무지했던 시절이었다.

    • @user-nn6ov9kp4g
      @user-nn6ov9kp4g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무령왕릉발굴만 봐도 뭐...... 진짜 무식한 시대였죠.

  • @user-kh3zy8tq8r
    @user-kh3zy8tq8r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다른교수님들도 지켜볼수있고 또 이어져내려온 사학뿌리니까 엄청조심하시네 그래도학설깬거 대단하십니다 리스팩!

  • @Yi-sum
    @Yi-sum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이런 말을 여기에 써도될 지 모르겠지만... 30년전에 하남시 하산곡동 검단산 자락 정심사 바로 아랫집에 살았었지요. 부모님이 집아래 공터를 텃밭을 만드셔서 도와주러 삽질 많이 했었는데 직육면체의 잘다듬어진 돌판이 하도 많이 나와 여기에 무슨 성이 있었었나 의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그 돌들을 모아 만든듯한 돌담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요새 가보니 많이 개발돼 당시의 모습은 전혀 없긴 하더라구요.ㅠ 오지랖이면 죄송하고 그냥 혹시나하는 맘에 적어봅니다.ㅎ

  • @sujungunni5990
    @sujungunni5990 3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11:56 심쌤 살짝 시간과 정신의 방에 계신 표정😅

  • @user-rf3lo8vf6x
    @user-rf3lo8vf6x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5

    역사학회에서 새로운 별이다
    고정출연 해주사고 분량을
    대폭 늘려서 발굴이야기
    해주십시요!@@@

  • @walkholic3
    @walkholic3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너무 잼있어요. 위례성이 발견된 역사가 너무 감동적이네요. 김부식 얘기도 너무 잼있네요~ㅎㅎ

  • @hoonhoon1502
    @hoonhoon1502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너무 흥미롭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
    들려주세요!!

  • @user-ck8cw1ec8q
    @user-ck8cw1ec8q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6

    발굴스토리 너무 재밌어요~~ 더줘❤

  • @mjwind7458
    @mjwind7458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저의 유년시절을 보냈던 풍납동. 저희집도 외가집도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어요. 그시절 부모님께서 어렵게 장만한 내집이 문화재터가 되는걸 보셨지만 인연이 아니었던거죠. 어쩌다 옛동네에 가면 변해버린 모습에 추억이 없어진것같아 아쉽긴 하지만 역사덕후로서 중요한 역사의 자리에 함께한것같아 의미가 큽니다. 영상 보는내내 토성을 뛰어논 것 같습니다.

  • @user-by6xz8eg3u
    @user-by6xz8eg3u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4

    그냥 막 되어먹은 상상인데요.
    하남 위례성이 《삼국사기》의 기록 탓에 강남 일대로 보이긴 하지만, 그건 후대에 이걸 기록한 글자의 글자만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오히려 당대 지명의 한자 표기법을 차용해보는 건 어떨까요. 河는 江과 마찬가지로 가람이고, 南은 마입니다. 실제로는 ㄱㆍ마의 형태인데, 이건 검을 이릅니다. 神과도 연결되고, 왕검성과도 연결됩니다. 慰는 성을 표기하기 위해 택한 글자로, 그 뒤에 오는 禮와 합쳐서 클리ㆍ구룬ㆍ구루ㆍ구려ㆍ가라 등을 표기하는 데에도 쓰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게 훗날 다른 찬자에 의해 수집되면서 중원 세력에게 우태 또는 구태 아들 설로 채록된 것이죠. 위례는 뒤에 오는 城과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남 ㆍ하북은 나중에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생긴 오해이고, 이 위례와 합치면 熊城ㆍ儉城ㆍ神城ㆍ漢城 등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지요. 왕성 또는 수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백제 마지막 수도이자 정궁으로 보이는 부여를 흐르는 錦江 또는 湖江도 상류ㆍ중류ㆍ하류의 별칭을 보면 크게 서울강ㆍ부여강ㆍ큰 강 계열이 보입니다. 수부가람은 셔불(순경음 ㅂ)가람의 뜻이고, 금강과 호강은 한강에 무게가 실립니다. 오히려 상류가 부여강 계열이고, 금강은 뜻은 부여강에서 왔지만 읽기를 큰 강으로 읽었기에 이렇게 채록되어 굳어진 것이죠.
    이들의 연원이 沸流水 가에 나라를 세웠다가 동명왕에 의해 제일 처음 복속당해 多勿都가 되었던 沸流國이며,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본거지를 흘렀던 비류수가 부여수이고, 지금 지린시를 통과하는 북류 송화강 상류 일대로부터 고고학적으로 원고구려집단이라 추정하는 이들이 머무른 것으로 보이는 現 서북한 압록강 중상류 일대를 불저ㆍ물저(앞선 표기는 多勿都이고, 이 소리를 바탕으로 동천왕 대에 표기한 것이 沃沮)로서 동명왕으로부터 분봉받은 것으로 생각해봅시다. 누리벌왕의 누루구룬 천도 추진과 관련해서 홀본계 귀족들과 힘을 합쳐 부여 조정 또는 부여 연맹의 수장국에게 싸울 때 기록된 것이 패옥의 패를 뜻하던 黃과 라 계열을 뜻하던 龍으로서의 ㅂㆍ라(黃龍國)이며, 양패구상으로 지금의 창춘시 눙안현으로 옮기는 것을 막지 못한 채 동맹의 나머지 축인 홀본계에게 축출당해 조정에 신속하고 남하해 세운 것이 무라ㆍ부라(海頭國, 이때가 남옥저 시절)라고 보고요. 그러다가 이 홀본계가 그 땅을 고스란히 주워담으며 설립한 서울(東扶餘, 새벌. 서울의 옛 형태인 셔벌의 한 표기로 홀본에서 졸본을 거쳐 이렇게 가다듬어짐)이 대부여왕으로 읽어야 하는 대무신왕의 정벌에 망하면서 나온 일파가 남하하며 비교적 영향력이 약해졌던 당대 남옥저 동방 영토를 점령하는 나비효과로 인해 골골대던 찰나, 최리 낙랑국 또는 남대방 자명고 설화의 기반이 되는 정벌전이 일어나면서 다시 쫓겨 내려가는 거죠. 이때 중심지는 지금의 황해남도 재령군 재령강과 황해북도 황주군 황주강 합수 지점 일대 어드메에 수도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내려온 게 임진강보다도 이남에 있던 지금의 한성백제인 거지요. 사실 해두국까지가 비류백제 또는 伯濟 시기인데, 부여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옥저로 표기했던 시절을 싹 지워버리기 위해서 훗날 나라 이름을 온제 즉 百濟로 짓고서 차별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십제 이야기는 프로파간다고, 비류백제가 바다 근처에 있어 땅이 염분이 많아 실패했다는 건 옥저로서 표기했던 후기인 해두국 시절 이야기이며, 국명 표기를 우리네 고유언어로 풀어내 차별화하면서 시조를 온조로 날조해 전달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훗날 부여 조정이 동천왕 때 크게 깨지고 백제에도 깨지며 허우적대다가 겨우 국력이 물이 올랐을 때 정식국호를 고려로 고친 후에야 비로소 남쪽에 내려와 다시 세운 부여/비류라고 마부여로 천명하고서는 수도 앞을 지나는 강에 비류수의 후손으로서 부여강이라는 이칭으로도 부르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사고의 흐름인 거지요.😅

  • @user-gh1dw4py1c
    @user-gh1dw4py1c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5

    완전 흥미진진 😊😊😊

  • @user-my6ie6hq4i
    @user-my6ie6hq4i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동쪽에 높은산? 그런거 없는데~

  • @newplus66
    @newplus66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백제 도성하면 웅진 사비 시대만 기억하는데 익산도 추가시켜 주십시오. 아무튼 한성백제의 풍납토성을 발굴해 주신 교수님 너무 고맙습니다.

  • @jungtop890
    @jungtop89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풍납동,다산 다 관계된 얘기라서 너무 흥미롭네요

  • @brandonann9283
    @brandonann9283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너무재미나요

  • @moisture_-
    @moisture_-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2:44 자막에 한국의 역사 깬다가 아니라 한국의 역사학계는 다 이병도의 식민사관 아닌가요??

  • @jonghopark8185
    @jonghopark8185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풍납토성 산책하기 정말 좋지요 ㅎㅎ

  • @jsy5187
    @jsy5187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좋은 영상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봅니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너무나도 편향된 정보만으로 배워왔던 세대인 저에게.... 한 인간을 평감함에 있어서 평면적으만 보는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새삼 느껴봅니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싫으니 싫어서 싫어할거야~ 하는 정도의 사고에서 멈추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저는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포함하여 이상하게 외곡된 평가들만 흘러다니는 인물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도 귀를 열고 그 시대속에 들어가서 곰곰히 그들 바라볼 생각을 하니.... 숙연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좋은 영상에 감사합니다.

  • @sufcjoseph88
    @sufcjoseph88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0

    교수님과 심용환선생님께서야 이병도 선생의 연구를 "그게 뭐야!" 하는건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셨겠지마는.... 노파심에 좀 얘길하자면, 당시 문헌사학자들의 지닌 한계는 그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그 시대 연구환경의 한계도 있었음을 같이 고려하고 영상을 보아주셨음 좋겠습니다. 모든 현재의 연구는 지난 선배 연구자들의 연구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걸 극복하고 뒤집었든 계승했던 간에 말이죠.... =_=;;

    • @sufcjoseph88
      @sufcjoseph88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그리고 하나더 노파심에 얘기하자면 이병도 선생을 식민사학이라고 하는 프레임 씌우는건 대개는 소위 환빠들(좀 더 세게 얘기하면 사이비역사 신봉자들)입니다.... 물론 이병도 선생의 연구가 현재의 연구자들은 물론 시민들의 입장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많고, 그걸 극복한 부분이 이제는 많지만 그의 사관이 식민사관은 아닙니다 =_=;; 당시 연구환경에 한계가 명백했을 뿐이지....

  • @tv-funhistorytv1061
    @tv-funhistorytv1061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크..!!! 신희권 교수님 오랜만에 뵙네요 ^^😊😊

  • @gwisekor
    @gwisekor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이분 잼있네요

  • @user-cx5pl6cg1g
    @user-cx5pl6cg1g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성남에도 궁내동이라고 있어요~~

  • @user-mu5wz3kd6j
    @user-mu5wz3kd6j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90

    역사 좋아하고 한때 잠깐이나마 전공 했던 사람으로써 이병도 교수님은 식민사학이라 오히려 우리나라 역사 연구를 퇴보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서가 없어서 넘 자료가 빈약해서 고구려 백제 역사 연구가 안되는게 넘 아쉽습니다

    • @taekyoungyeo2680
      @taekyoungyeo268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이병도가 식민사학이라니 ㅋㅋㅋㅋ

    • @shinhwang885
      @shinhwang885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taekyoungyeo2680맞구만. 뭘 처웃어. ㅋㅋㅋ

    • @taekyoungyeo2680
      @taekyoungyeo268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shinhwang885 그 백제-신라 건국연대를 고이왕이랑 내물왕 연대로 끌어올린 양반인데 식민사학이라고 하는건 걍 환스러운 애들이나 하는거지 ㅋㅋㅋㅋ

    • @taekyoungyeo2680
      @taekyoungyeo268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shinhwang885 그 이병도를 깔꺼면 역사연구한걸 기반으로 옛날 학설이라서 이제는 더이상 고고학적으로는 맞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로 까면 될 인간인데 굳이 식민사학이라고 들고오는건 걍 한사군 트집 잡는 애들 종특 아닌가?

    • @krappa-x2n
      @krappa-x2n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식민사학x 주류사학o

  • @peace77777
    @peace77777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잘나가다가~ . 인간 사람 심리 공부 끝이 나면 역사 모두 다
    진실ㅡ선견지명 지혜 나온다. 찾을 수 있습니다. 문헌!ㅡ 존중합니다

  • @hyekyungjung4977
    @hyekyungjung4977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아파트 주민들이 이형구 교수를 몇시간이나 가둬놓고 사지를 자른다고 난리도 아니었지요. 기업의 의뢰를 받고 풍납토성이 위례성이 아니라고 주장한 학자를 내세워 서울시를 대상으로 소송을 했다가 서울시가 승소를 했지요.

  • @wkshin2599
    @wkshin2599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백제의 영토는 위로는 유연제노
    아래는 오월에 접한다는데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백제 멸망후 그땅을 발해와 신라가 나눠가졌다는데, 위치상 그게 가능하나..
    대륙 백제 아니고는 설명할수 없다
    위례성은 중국 산서성 직산현 이다..

  • @jamessong8729
    @jamessong8729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한성백제 400년이 너무 홀대 받는다니 ㅠㅠ. 공주 부여 다 합쳐도 한성백제 기간이 더 긴데.

  • @letter.4u
    @letter.4u 7 วันที่ผ่านมา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봅시다.
    새로운 문이 열릴겁니다.

  • @user-ji4gl4fr8w
    @user-ji4gl4fr8w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그쪽 공부 조금한 분들은 알지요!
    사성? 이거 관련된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분통터지고 열 받지요!

  • @minkyungkim8420
    @minkyungkim842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7

    학부생 때 신희권선생님 팀에서 아르바이트 했었는데. . . 그때도 재미있으셨는데. . . 학생들이 수업이 재미있어서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겠어요.

  • @Tuna011
    @Tuna011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6

    아파트 밑에 묻힌 유적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네요.

  • @gounbyun3417
    @gounbyun3417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와아- 오늘 국립중앙박물관 애 데리고 오랜만에 가봤는데 풍납토성도 가봐야 겠어요. 너어무 재밌었어요. 꼭 또 모셔주세요!

    • @gounbyun3417
      @gounbyun3417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user-bj6cs3zj5c 찾아보니 이미 발굴한 걸 덮은 건 아니고, 계획대로 복원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지 않아서 아직도 언덕형태로 남아있나 보네요.

  • @duckin5254
    @duckin5254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근데 의문점이 하나 있습니다
    한강이북이 고구려땅인데 아차산에서 뻔히 보이는곳에 왕궁이 있었다는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말씀중에 천안에 바다가 없다고 하셨는데 직산에서 서쪽으로 둔포까지 직선거리 14km 바다가있고 북쪽으로 거대한 안성천이 흐르죠
    온조 사당도있고 천안 직산이 타당한것 같기도 합니다

    • @taekyoungyeo2680
      @taekyoungyeo268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아니 그 천안 직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생각이란걸 해보고 좀

    • @user-yl8or3pf9t
      @user-yl8or3pf9t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원래 백제는 산동반도에 있어야 하는게 맞음

    • @Epichero1010
      @Epichero101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초기 백제는 서울일대가 영토의 전부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인천 충청 전라로 영토를 확장한거죠. 고구려 또한 초기부터 한강이북을 지배한게 아니라 점차 세력을 확장한겁니다. 의도적으로 고구려 국경 근처에 수도를 정한게 아니고 세월이 흐르다보니 수도 위에 강대국인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게 된 셈이니 이상할게 없죠. 현대 서울도 비슷합니다. 조선시대 동안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북한이 갑자기 생기면서 장사정포 사정거리에도 들어오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땅이 되버렸잖아요.
      역사 학사는 위치를 유추해 내고 고고학자는 유물로 그 가설을 증명하죠. 천안 직산도 문헌, 역사서로 유추는 할 수 있죠. 그럼 유물, 유적지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가설이 진리가 되는겁니다. 직산 근처 풍납 몽촌 만한 유적지가 나오지 않는 이상 여러 가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 @Epichero1010
    @Epichero101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좁아터진 사학계는 15년전에도 한쪽에선 절대자이자 진리처럼 추앙받고 다른쪽에선 식민사관 친일파로 비판받았는데 그후로 친일 인명 사전에도 등재되고 죽은지 30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살아있는듯 못까는 구나. 실증사학 한다는 사람이 바람드리 -배암드리- 사성??

  • @hwa1756
    @hwa1756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4

    이병도의 일제 사관을 깨주시기 바랍니다.

  • @하지마이상해
    @하지마이상해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땀"은 구라치지 않는다.

  • @user-ej1dv9su2b
    @user-ej1dv9su2b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풍납토성 지리적 위치가 안좋앗나???
    나라가 망하고 수도가 사라져도 지리적 위치가 좋았다면 사람은 계속 살지 않았을까 싶은데...

  • @hunlook3178
    @hunlook3178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와우, 우리가 배울 때만해도 위례성은 위치가 애매모호하다고 해서 결과적으로는 모른다고 한 것 같은데. . . 업데이트 했네요. 👏👏👏👏👏

  • @user-vn2ec7ob2c
    @user-vn2ec7ob2c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한성 백제는 소설~~~
    백제의 왕성은 황해도 재령이다.

  • @user-dp5zy7dd8r
    @user-dp5zy7dd8r 2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풍납,몽촌토성같네요

  • @user-mm1iw3st1y
    @user-mm1iw3st1y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용환님 77 뱀띠 갑장이시네요 ㅋㅋ

  • @user-jp1kb2ye9u
    @user-jp1kb2ye9u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5

    천안에 위례성이 있긴있어요 둘레 500 미터짜리 조그마한 토성ㅎ ㅎ백제가 한강유역을 뺏긴후에 지어졌다고 하더라구요

    • @user-ni3rr4bv1u
      @user-ni3rr4bv1u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천안 위례산에 5세기 백제 목곽고 발굴 온조의 용샘설화도 내려옴

  • @user-gk3hw3qo3j
    @user-gk3hw3qo3j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뭐야 이병도 논리가 거의 환단고기 신봉자들 수준이였구나...ㅋㅋ

  • @dennyhong6198
    @dennyhong6198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5

    진짜 역사를 알려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병도의 조선사 편수회는 사기~ 강춰진 역사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 @user-uv3ee3to6x
    @user-uv3ee3to6x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7

    1000년 왕국 백제의 수도가 꼴랑 그 정도 규모라고?
    각설하고...
    풍납토성이 백제의 수도라고 치고...
    조선이 수도 한양 근처에 조상의 무덤을 쓰는게 상식이듯이...
    백제의 왕들의 무덤은 어디 있느뇨?

    • @user-jw6dc4ep8g
      @user-jw6dc4ep8g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저 동네 개발되기전에 규모가 큰 무덤이
      몇 개 있었다?
      방송이나 제대로 보고 대륙백제 주장하던가!

  • @American-drone
    @American-drone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오 신희권 교수님 나오셨네요

  • @user-fe7st6gv3z
    @user-fe7st6gv3z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4

    공사하다 항아리 기와 나오면 포크레인으로 퍽퍽 부시고....
    건축주나 건설사에게 정당한 보상이 지급되야 발굴에 속도가 붙겠죠?

  • @minsooseo3102
    @minsooseo3102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되요X 돼요O 오타인것 같아요.

  • @user-sk7sy2ky6k
    @user-sk7sy2ky6k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서울은 개발 하면 안됐음.
    백제 조선 고대 무덤이나 역사적 유물 발굴 하는 지역으로 했어야.
    땅이야 많으니깐.
    다른 곳에 수도 정했으면 되는 일인데.
    서울이 무분별하게 개발 되면서
    귀중한 백제 역사 사라졌음.

  • @user-jq5ke4rr2m
    @user-jq5ke4rr2m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6

    풍납토성에서 왕성증거 하나도 없음..백제시대 무역항으로 봐야함

  • @cooldaz1
    @cooldaz1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2

    춘궁동일대 3기신도시가 들어선다는 교산일대가 한성백제 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금암산 올라 바라보면 입지가 좋고 절터도 많고 수해도 덜입을 방어에 아주 유리하고 좋은 지형입니다 남한산성과도 멀지않고 발굴도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뭐가 나올지 모릅니다 위에 한수(한강)가 흐르고 동쪽에 산이 가로막고(검단산) 서쪽으로 비옥한평야 바다에 접한다에 부합합니다 몽촌 풍납은옆에 산이 없습니다 규모도 작고 상습침수구역인데다 건너편 아차산에 조망이 너무 노출되어있기도 하구요 적군 바로앞에 왕궁을 세우진 않죠. 왕궁근처 필수인 절관련 유적도 의미있는 발견이 안되고 있구요 교산은 근처 감일에 대규모 무덤이 최근발견되었구요 교산에 주춧돌 절터가 많이 산재합니다 이병도를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다산 선생과 이병도의 말이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봅니다 교산 개발시작되면 뭐가 터질지 모릅니다 .ㅎㅎ

  • @SangParker
    @SangParker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300기 이상 백제무덤 어쩔거야

  • @jjs_issle
    @jjs_issle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풍납토성이야기 넘 잼나요.!!!신희권교수님👍

  • @bominkim7950
    @bominkim795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

  • @user-uw3lx9gy4p
    @user-uw3lx9gy4p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9

    백제는 중국에 있지않나...

    • @bgkhan4475
      @bgkhan4475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중국 ㄴㄴ 대륙

    • @user-jw6dc4ep8g
      @user-jw6dc4ep8g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환빠들 못지않게 조심해야될 애들이죠!ㅎ

  • @chajaemyung
    @chajaemyung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4

    아파트 공사를 해야하는데 뭐가 자꾸 나와 ㅎㅎㅎ 진짜 짜증났을 것 같다.

  • @letter.4u
    @letter.4u 7 วันที่ผ่านมา

    삼국사기 부실?
    식민사관이 부실하지

  • @tv-funhistorytv1061
    @tv-funhistorytv1061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출현하고 싶다 ㅠ
    짧은 인연이지만 신희권 교수님도 저를 알아보실 수 있을텐데 ㅠㅠ

  • @user-cp8sb7ow4j
    @user-cp8sb7ow4j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백제역사가 많이 안알려져서 오히려 재밌던데 풍납토성 발굴이 이렇게 됐군요

  • @user-jc5cl9us4g
    @user-jc5cl9us4g 4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아니 천안 직산은 바다에서 멀다해놓고 서울 강남은 맞아??ㅋㅋㅋ 직선거리 따져봐ㅋㅋㅋ 어디가 더 바다에서 먼지ㅋㅋ

  • @letter.4u
    @letter.4u 7 วันที่ผ่านมา +1

    백제를 중국에서 찾아보시길.

  • @co-musician640
    @co-musician64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배암 바람은 좀 억지…
    차라리 차가운 북풍을 막는 길고 구불구불한 토성이라 바람성, 뱀성이라고 했으면 설득력이 있었을텐데
    15:08 이병도-뱀 :바람 설을 스스로 진짜 추운 바람주는 동네라고 부정하는 장면

  • @bm00m
    @bm00m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1

    조선이 개국하고 고대역사서를 분서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 @badapic
      @badapic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 한민족고대사서가 조선왕조와 일제를 거치면서 몽땅 불태워졌다는 것은 식민사학자들의 조작입니다. 진시황의 서슬퍼런 분서갱유에도 제자백가의 모든 사상들은 살아남아 후세로 전해졌습니다. 시덥잖은 조선왕조나 일제가 무서워서 조상 대대로 전승되어 온 소중한 고대사서를 몽땅 폐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은 일제의 수서령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세상에 나올 한민족고대사서를 위서로 몰기 위하여 몽땅 수서되어 불태워졌다고 프레임을 건 것입니다. 딱 2권만 정사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야사나 위서로 몰아서 식민사학 이론을 유지하기 위해서 입니다. 으로 범위를 좁히면 식민사학 이론을 고수하기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2권도 없애고 로만 를 기술하고 싶은데 이러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무도 믿지 않을테니까 이런 수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위 정사인 도 그들의 식민사학 이론에 맞지 않으면 조작이라고 목청 높이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게 작금의 식민사학 이론입니다.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역사학이 아닌 국문학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식민사학을 역사학참칭식민주의소설학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 일례로 일제 1대 통감 데라우치는 수서령을 내려 20만권을 불태웁니다. 하지만 이때 불에 탄 대부분의 서적은 1894년 갑오개혁이후 근대 교육을 고종이 도입하면서 제작한 국사책들입니다. 초중고 교과서이니 얼마나 많이 제작되었겠습니까? 그것이 불탄 것입니다.
      ☘ 또 조선왕조수서령을 과대포장하여 조선왕조 때 이미 한민족고대사서들이 절멸된 것처럼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실제로 불에 태워진 것은 태종 때 태종이 직접 불태워버린 신비집(서효사) 한권입니다. 세조, 예종, 성종 때 3차례 실시된 조선왕조수서령은 사실 2차례이고 마지막 성종 때 실시된 것은 사실상 수서된 사서들을 돌려주란 인 것입니다. 이 3차례 수서령 중 불에 태워진 서적들도 있었는데, 그 서적은 사서가 아니라, 도참·비기와 같은 조선왕실에 위해를 입힐 수 있는 서적과 예법 서적입니다. 관혼상제와 같은 예법을 통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조선왕조가 시행하는 것과 다른 예법을 써놓은 서적들을 불태운 것입니다.
      ☘ 성종 때 실시된 도참·비기·예법 서적 수서령과 사서 반환령에 따라 다시 찾아간 사서는 민간에 남아있을 것이고 찾아가지 않은 사서는 조선왕조 내내 서운관과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서운관과 규장각에 보관되었다는 사실은 연산군~중종 때 찬수관을 지낸 이맥이 를 지으면서 쓴 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도 한민족고대사서가 건재해 있던 것입니다. 이것을 조선을 강점한 일제가 싸그리 털어갔습니다. 이중 중요한 고대사서는 필시 일본 내 어딘가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와야 합니다. (사실 대한민국 중앙박물관 수장고에도 일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식민사학자들이 꽁꽁 감추고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박물관장이나 학예사들도 거대한 식민사학 카르텔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집니다.)
      ☘ 민간에 남아있던 사서는 유교와 사대가 국시인 조선왕조 내내 집안 내에 수장되어 있다가 1894년 고종황제가 갑오개혁을 실시하자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세상으로 한두권씩 나오게 됩니다. 이중 과 5권을 기가막히게 묶어서 출간된 것이 입니다. 및 은 일반대중들이 올바른 한민족고대사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위한 강단식민사학자들의 프레임입니다. 이 프레임에 걸려들면 안됩니다. 강단식민사학자들은 사학관련 4대 국가기관(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을 장악하고 연예산 600억원을 사용하여 이 프레임을 전파하기 위해 나무위키 등 인터넷과 유튜브 등의 댓글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아마 저의 이 댓글에도 금새 달릴 것입니다. 아님 말고요. ^^)
      ☘ 아무튼 결론적으로 조선왕조수서령과 일제수서령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지금도 2-3년에 한권씩 나타나고 있는 한민족고대사서가 위서로 몰리는 상황이 연출되니 양 수서령의 실상을 정확히 알자는 것입니다. 분명히 앞으로도 한민족고대사서는 계속 세상에 나타날 예정입니다.

    • @badapic
      @badapic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 《조선왕조실록》 『성종(재위 1469~1494) 1년 12월에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 1백여 권과 《호중록》, 《지화록》, 《명경수》와 무릇 천문·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했으니 상항 명경수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 《도선참기》는 전일의 하유에 따라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
      ☘ 분명히 돌려주라고 되어 있죠?
      -

      다소 길지만 읽어 보시면 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외교적 입장이고 내정은 다르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
      명태조 주원장에서 모든 일은 시작됩니다. 하층 농민 출신으로 중국의 황제가 된 두 번째 인물(첫 번째는 한고조 유방)인 주원장은 지독한 의심병 환자로 대업을 이룬 후 을 일으켜서 홍무 13년에서 26년까지 14년 동안 명나라 개국 공신을 거의 모두 숙청하고 연루되어 피살된 자가 무려 45,000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
      그런 명태조 주원장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집권한 조선 왕조라도 요동을 정벌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여 표전문 등 핑계로 조선의 사신들을 억류하고 죽기 직전까지 구타하는 등 행패를 부렸지만 사신 권근이 를 제출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더는 조선에 행패를 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
      이 중 9번째 시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가 일제에 의해 식민사학으로 악용되고 현재 국사 교과서로 77년 간 국민들에게 가르쳐 졌습니다.
      -
      '시고개벽동이주'를 검색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제 식민사학 그대로입니다. 으로서 라는 메시지를 주원장에게 전한 것이지요.
      -
      이성계 일파는 가뜩이나 정통성이 약한데 명마저 조선 개국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어 살얼음판이었는데 권근이 이를 해결해 오자 환영 일색이었음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합니다.
      -
      이런 중간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도 사신으로 파견되어 후에 영락제가 되는 연왕을 만나고 명태조 주원장도 만나서 인맥을 쌓아놓게 되는데, 후일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태종 이방원에게 이 인맥은 긴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정통성이 약한 태종이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작은 빌미라도 잡히지 않게 취한 조치가 인 것입니다.
      -
      때는 흘러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김종서 등 수많은 중신들을 주살하고 정권을 탈취합니다. 이때 명나라는 정통제·천순제인 주기진이 1436년 8세에 즉위하여 22세에 몽골족의 포로가 되었고 30세에 복위하여 40세가 채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
      주기진은 부친인 선덕제의 번영을 남벌과 북벌로 망쳐놨고, 몽골 에센칸과 대결한 북벌의 와중에 포로가 됩니다(토목의 변). 몽골이 진군을 주춤한 사이 북경에서는 재빠르게 동생 주기옥을 경태제로 옹립하였고, 수도를 요새화하여 2달 뒤 쳐들어온 몽골군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습니다.
      -
      몽골군은 정통제 주기진의 몸값 지불을 요구했지만, 경태제가 있는 명나라는 이를 거절, 할 수 없이 몽골군은 1년 뒤 주기진을 무상 석방합니다. 이때 주기진을 맞이한 것은 허름한 수레 하나와 말 두 필뿐이었습니다.
      -
      경태제 주기옥은 주기진과 황후를 남궁에 유폐시키고 7년간 외부와의 접촉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주기옥의 태자가 사망하고 주기옥도 병에 걸린 상태에서 주기진은 정변을 일으켜 1457년 복위합니다(탈문의 변).
      -
      다시 복위하여 천순제가 된 주기진은 오랜 연금 생활을 겪으며 의심과 앙심을 품게 되었고 환관과 비밀경찰을 이용하여 정변의 주모자들마저 숙청하는 등 공포 정치를 폈습니다.
      -
      이러한 주기옥과 주기진의 치세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어린 조카를 폐위시키고 수많은 중신을 주살하며 보위에 오른 세조는 취약한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일단 현 황제인 동생 주기옥에게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조의 태세는 연금 중이던 형인 전 황제 주기진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고요.
      -
      더군다나 북벌에 실패해 만리장성 이북에 대한 지배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개국 초부터 말썽이 되어 온 요동 땅이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기진의 걱정을 상쇄시키고 자신의 왕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세조의 정책이 바로 이었습니다.
      -
      그것도 부족하다 생각한 세조는 개국 초 외교 슈퍼스타 의 손자인 에게 에 친절한 주를 달게 한 를 1462년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읽혔습니다. 1책 짜리 이 책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무려 보물로 지정. 참고로 137권 75책인 도 보물. 즉, 국보가 아니고 같은 등급.
      -
      주기진의 복위가 1457년 1월이고 세조의 이 같은 해 5월인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러한 수서령은 주기진의 치세에는 계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조를 이은 예종도 을 내렸습니다.
      -
      하지만, 주기진이 복위 10년 뒤인 만 40세에 사망합니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더이상 수서령을 내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주기진 사망 직후인 성종 1년에 을 내려서 수거했던 고대사 책들을 민간에 돌려준 것이 1/2/3차 11년에 걸친 의 전말입니다.

    • @user-ej8mn8xs9x
      @user-ej8mn8xs9x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조선왕조실록에 3대왕실록에 내용이 나와도 그것을 왜 실행했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학자들은 잘 없죠

    • @badapic
      @badapic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user-ej8mn8xs9x 식민사학자들은 위의 진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알아도 말할 수 없고 몰라도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몰라서 말할 수 없다는데 더 겁니다. 사학자들이 연구는 안 하고 유튜브 댓글 다는데 시간을 씁니다. 가끔 저의 댓글에도 끼어드는데 몇번 박살이 나더니 제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는지 요즘은 안답니다. 한편으로는 편하고 한편으로는 심심합니다. ^__^

  • @user-qi7rz2gz9l
    @user-qi7rz2gz9l 12 วันที่ผ่านมา

    왕릉급 무덤 280기를 누가 밀었다구요? 카더라 하지 마시고 정확한 증거를 말씀해 주세요~ 경주처럼 고분군이 서울에 280여개가 있었다면 사진이나 자료, 증거들이 충분히 있었을 텐데요~

  • @dufosla2
    @dufosla2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3

    백만대군을 거느린 500년 도읍지면 한강이남이 번성한 도시로 남아있었겠지. 토성하나 불탔다고 도시가 사라지겠나.그런 수도가 역사에 있나.
    평양일대에 있는거 아님?

    • @bluestonejim2500
      @bluestonejim2500 5 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땅투기군 뇸아 헛소리 말라
      과욕부리다 굥서결이 당선되어 후진국되는것 못 보었냐?
      탐욕부리다가 부동산가격 일본처럼 폭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