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스페셜 - 진주농민항쟁, 모두가 난을 생각한지 오래다 / KBS 2012.8.30.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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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5 ต.ค. 2024
  • 1862년, 진주 농민의 피맺힌 함성이 진주를 넘어 한반도 전체에 울려퍼졌다. 수탈과 탐학의 수렁에 빠진 조선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조선 최대의 민중혁명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1862년 진주, 항쟁의 불길이 타오르다
    1862년 한 해 동안에만 전국 71곳에서 농민들이 난(亂)을 일으켰다. 경남 진주는 그해 봄에 처음으로 난이 시작된 곳으로 이후 민란의 기운은 경상도를 넘어 전라도, 충청도로 삽시간에 퍼진다. 그렇다면 유독 1862년에 그 많은 민란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시작은 왜 진주였을까?
    [역사스페셜]에서는 당시 농민항쟁의 발생배경과 과정을 담은 문서와 현장 취재, 후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진주농민항쟁을 재구성해 본다.
    양반세력까지 가담한 반봉건적 농민혁명
    진주농민의 거센 기세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정은 안핵사 박규수를 진주로 급파한다. 당시 진주농민항쟁의 발생부터 수습의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 [진양초변록]에서 박규수의 수사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에서 박규수는 민란의 배후로 ‘홍문관 교리’ 출신인 유력 사족 이명윤을 지목한다. 그뿐 아니라 당시 지배층에 속했던 양반들도 농민시위대에 합류한다. 양반 중심의 나라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조선 지배질서의 중심세력이던 그들은 무슨 이유로 농민의 난에 가담한 것일까?
    농민들은 왜 무력봉기를 선택했나?
    진주농민항쟁 1년 전인 1861년, 경상우병사 백낙신이 진주에 부임한다. 그는 과거 여러 차례 비리를 저질러 파면을 당하기도 했던 인물로 진주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수십 년간 지속된 삼정의 문란과 가혹한 수탈로 농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최고조로 누적된 상황에서 백낙신의 지나친 학정과 세금수탈이 진주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진주농민들은 합법적 민원 절차인 등소(等訴)와 의송(議送)을 통해 조정에 수차례 호소해왔지만,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862년 2월 18일(음력) 무력봉기를 택하기에 이른다. 무력봉기는 당시 지배층에 대한 도전이었는데, 이를 주도한 이는 다름 아닌 몰락양반 류계춘이었다. 처음 주도자로 몰린 이명윤 또한 류계춘을 실질적 주도자로 지목한다. 강직한 선비 집안 출신인 류계춘은 왜 농민들의 난을 주도하게 된 것일까?
    진주농민항쟁의 후폭풍, 그리고 역사적 의미
    조선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고심책을 내놓는데 그 결과물이 삼정운영의 개혁안을 담은 [삼정이정절목]이다. 이 개혁안은 당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 일정 부분이 반영된다. 이로써 진주농민항쟁은 기존 봉건질서를 깨고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한편, 진주농민항쟁은 부패한 조선 사회에 경종을 울렸지만 주모자들은 역적이 됐고 후손들은 역적의 후예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왔다. 다행히 2012년 기념탑 건립과 위령제가 열리면서 진주농민항쟁의 위상이 재조명받고 있다.
    신역사스페셜 112회 - 진주농민항쟁, 모두가 난을 생각한지 오래다 (2012.8.30.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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