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산의 숲이 우거진 것은 인공조림 영향도 크지만 더 큰 원인은 80년대초부터 농촌에도 연탄보일러보급.90년대 이후 석유 보일러 보급으로 더 이상 산에서 나무를 자르지 않게 되면서 숲이 울창하게 됩니다.각종 나무가 뒤섞여 정글처럼 자라는 숲은 자연림이고 수령은 40년 안팎입니다.
산에 나무가 없어진 가장 큰 이유는 온돌때문이라기 보다는 조선 전기에 비해 3~4배 늘어난 인구때문 입니다. 세종때 3~4백만이던 인구가 영정조때 7~8백만에 이르렀고, 고종때에는 15백만까지 늘어났죠. 인구가 느니 집을 짓거나 땔감용 목재에 대한 소비가 늘어나고,산은 점점 황폐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온돌이 18세기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하니 매우 흥미로운데, 그러면 그전까지는 어떻게 난방을 했나요?
@@장가방-n3y 화로 정도로는 난방이 안됩니다.밥도 해 먹고 소를 키우는데 소죽을 매일 한두번 쑤어 먹여야 하니 농가 1호당 기본 아궁이 두개입니다.즉 불 때는 방이 두개입니다.외양간이 별채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본채 좌우측 어느 한쪽에 있고 외양간에 딸린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무는 인근 산에서 베어다 때었습니다. 예컨데 아들이 3명이고 결혼 시키면 큰 아들은 분가를 안 하고 부모와 살고 둘째 세째 아들은 결혼하면 같은 동네에 살고 새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조선 후기에 지금처럼 목재를 외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니 인근 산에서 베어 집을 짓게 됩니다.이때 지어진 집은 요즘 보는 한옥이 아니라 키 170인 사람이 집안에 들어가면 손으로 서까래와 대들보가 다 만져지는 낮은 집을 짓게 됩니다.이런 집들 새마을운동 이후로 다 철거되어 지금 없습니다. 지금 60대 정도 된 농촌 출신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농촌출신이라 잘 압니다.제가 올린 농촌 영상 참고하세요.
온돌이 없었어도 결국 다른 방식으로 난방을 하지 않았을까요. 18세기 정도면 사람들이 난방을 할 궁리를 했을 텐데 어떤 난방을 하던 결국 나무를 사용 했겠지요. 물론 당시 산림벌채는 온돌이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 이었겟지만 오로지 온돌혼자 덤테기 쓸수도 없고 난로라면 짚이나 기타 연료를 쓰기 어려워서 나무를 더 벌채해야 할지도 모르 겠네요.
중근세 목재고갈을 극복한 사례가 영국입니다. 증가하는 인구에 따라 숲이 끊임없이 개간되고 대항해시대를 맞아서 선박건조를 위한 벌채로 숲이 거의 사라지게 되자 영국은 제철을 하기 위해서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 석탄에 눈을 돌리게 되고 석탄이 새로운 에너지자원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석탄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갱도가 깊어지고 자꾸 고이게 되는 지하수를 퍼 올리기 위한 펌프(증기기관)의 개발이 산업혁명과도 연결이 되죠
박정희 정권 때 조림사업도 한몫 했을것 같네요 --- 1960∼1979년의 20년간 조림면적은 약 3,110천ha로서 우리나라 산림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이어 1980~1989년에는 859천ha, 1990∼1997년에는 241천ha, 1998~2004년에는 147천ha를 식재하였다.
온돌이 없어도 난방은 필요하고 취사용 땔감은 사계절 필요하다. 더구나 온돌은 취사를 겸하고 방을 작게하고 한가족이 모여자면 온돌이 없는 경우보다 효율이 높을 수 있다. 문제는 인구 증가와 화전이다. 이렇게 인류는 숲을 파괴했다. 중국의 화북대평원도 원래 코끼리가 놀던 숲이었고 유럽대평원도 원래 숲이었다.
잘만들어진 온돌방은 한번 불을 때고 3~4일간 난방이 유지되는 시스템입니다 구들장이 있는 온돌 난방 지식이 없는 말씀이시네요 조선의 민가 주변 산림이 황폐화된 것은 인구증가와 소빙하기 추위 때문이지 온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방식의 난방보다 더 적은 땔감을 필요로한 방식입니다
꼭 온돌을 집에 설치해야 했나? 그냥 화로를 쓰면 됐을 텐데 차라리 온돌 땔 나무로 벽을 두껍게 만드는데 썼으면 더 나았겠다. 화로를 쓰면 화재 위험이나 연기 때문에 호흡기에 안 좋은 단점이 있지만 열 효율은 화로가 더 낫고 땔나무 낭비도 적었을 텐데... 일본은 조선보다 따뜻해서 나무가 자라기 쉬운 환경이었죠. 게다가 겨울이 조선만큼 춥지 않으니 온돌이 필요없어서 난방에 땔나무를 많이 쓸 필요가 없었죠. 이게 오히려 나무를 보존할 가능성이 높았겠네요.
그냥 심자 심자 한다고 손쉽게 해결되는게 아니예요. 땔감을 대체할 연료를 개발 또는 발견했어야 하는거죠. 석탄이라든가.. 그리고 설령 석탄이 있다고 해도 그 석탄을 어떻게 보급할건가요? 유통은요? 수레가 다닐 길도 잘 없어서 보부상이 내륙유통을 담당한 조선에서 과연 석탄이 잘 보급됐을지도 의문.. 그런 경제구조나 유통시스템까지 모조리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되는거죠. 민둥산 문제는 1960년대까지도 계속됐습니다. 조선시대만의 문제가 아니예요. 일정기에는 대도시 몇몇만이 화석연료를 에너지원으로 썼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인구는 농촌에서 땔감을 에너지원으로 썼기 때문이죠. 해방후에도 여전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난방에너지가 석탄으로, 그리고 석탄에서 석유나 가스로 이환된건 197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그제서야 삼림벌채가 중단됐고 그 덕에 현 대한민국이 산림녹화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식목일을 위시한 나무심기운동을 박통때 진행시키긴 했지만, 나무심기운동이 산림녹화를 성공시켰나? 아니올시다죠. 결국 답은 경제발전과 산업화였던 것입니다. 그런 에너지혁명을 과연 조선에서? 조선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버거운 미션이었던거죠.
온돌은 민가에서 보급되었습니다 한옥도 집을 짓는 것도 전부다 민가에서 부터 발전을 했습니다. 왕과 궁궐을 짓는 대목수들이 지을 때 그것을 기록으로 암긴것이지 실제역사는 그것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또한 나무 는 주기적으로 베어서 사용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산림에서 나무가 전부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소나무는 왠만하면 베지않고 냄겨 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땅에 묻혀있던 씨앗들이 주기적으로 나무로 자랐고 사람은 계속 그 것을 취하지만 해마다 나무는 다시 자라났습니다.
산에 나무가 부족해져서 정조가 '소나무 베면 뒤진다' 라고 엄명을 내린 적도 있고, 기록들이 죄다 뒷받침해주는 18세기 19세기의 팩트인데 그걸 부정하려듬? 하물며 '붉은 산'이라는 단편소설 모름? 붉은 산이 왜 붉은 산인데? 나무가 하나도 없는 민둥산이 한반도의 일반적인 풍광이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등장인물이 죽으면서 고향 생각하면서 붉은산 드립을 쳤지
최박사님 강의 사이사이에 희경씨의 반응과 댓구가 정말 좋습니다!
NZ 교민 전 대학강사 66세
국내 산의 숲이 우거진 것은 인공조림 영향도 크지만 더 큰 원인은 80년대초부터 농촌에도 연탄보일러보급.90년대 이후 석유 보일러 보급으로 더 이상 산에서 나무를 자르지 않게 되면서 숲이 울창하게 됩니다.각종 나무가 뒤섞여 정글처럼 자라는 숲은 자연림이고 수령은 40년 안팎입니다.
정답입니다~.
박사님의 세계역사와 경제에 대한 명쾌한 설명 잘듣고 있습니다
👍
세상은 다양해요. 박사님 같은 분이 계시다니~~~ 나에게 치명적으로 부족했던 이 큰 부분을 듣게 되니~~~
얼마나 귀한지요. 정말 멋진 분이 십니다. 쉽고도 체계적이고~~~정말 고맙습니다.
시골에서 밥짓는 데 쓰는 것과 온돌의 영향이 절반이었다고 보면됨. 시골에서는 나무를 쓰기도 했지만 농사지으면 벼, 보리, 밀짚을 태워서 연료로 많이 사용함. 근데 예전에는 화전민이 산에 불을 질러 나무를 없애고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화전민 부터 없앴죠...
대한민국의 박정희 최준용 박사님 너무너무 사랑 합니다
60년대 중반부터 연탄보급. 화전민 이주와 나무심기를 다 한꺼번에 매달린 정책 효과가 큽니다.
산에 나무가 없어진 가장 큰 이유는 온돌때문이라기 보다는 조선 전기에 비해 3~4배 늘어난 인구때문 입니다.
세종때 3~4백만이던 인구가 영정조때 7~8백만에 이르렀고, 고종때에는 15백만까지 늘어났죠. 인구가 느니 집을 짓거나 땔감용 목재에 대한 소비가 늘어나고,산은 점점 황폐화되어 갔던 것입니다.
온돌이 18세기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하니 매우 흥미로운데, 그러면 그전까지는 어떻게 난방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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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lakepaxphile 답변 감사합니다~~.그런데, 화로보다 온돌이 땔감 소요가 많은가요? 상식적으론 온돌이 난방보다 열 효율이 좋은 것 같은데....
@@장가방-n3y 화로 정도로는 난방이 안됩니다.밥도 해 먹고 소를 키우는데 소죽을 매일 한두번 쑤어 먹여야 하니 농가 1호당 기본 아궁이 두개입니다.즉 불 때는 방이 두개입니다.외양간이 별채로 있는 것이 아니고 본채 좌우측 어느 한쪽에 있고 외양간에 딸린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무는 인근 산에서 베어다 때었습니다.
예컨데 아들이 3명이고 결혼 시키면 큰 아들은 분가를 안 하고 부모와 살고 둘째 세째 아들은 결혼하면 같은 동네에 살고 새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조선 후기에 지금처럼 목재를 외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니 인근 산에서 베어 집을 짓게 됩니다.이때 지어진 집은 요즘 보는 한옥이 아니라 키 170인 사람이 집안에 들어가면 손으로 서까래와 대들보가 다 만져지는 낮은 집을 짓게 됩니다.이런 집들 새마을운동 이후로 다 철거되어 지금 없습니다.
지금 60대 정도 된 농촌 출신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농촌출신이라 잘 압니다.제가 올린 농촌 영상 참고하세요.
여지껏 일본식민지시대에 일본이
다가져가서 벌거숭이가 됐다
해서 그런줄 알았는데…..??
@@장가방-n3y 온돌 따듯하게 하려면 생각한것보다 많이듭니다 그리고 12시정도에 한번 ㄷ때야합니다 그리고 새벽4-5시에 밥하면서 한번 더 때죠 상당히 많이 듭니다
생각보다 온돌이 오래되지않았군요.최준영로드를따라.꾸뻑.
3:51이 정약전이 정약용의 동생이라 하시는데 형입니다.
온돌이 없었어도 결국 다른 방식으로 난방을 하지 않았을까요. 18세기 정도면 사람들이 난방을 할 궁리를 했을 텐데 어떤 난방을 하던 결국 나무를 사용 했겠지요. 물론 당시 산림벌채는 온돌이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 이었겟지만 오로지 온돌혼자 덤테기 쓸수도 없고 난로라면 짚이나 기타 연료를 쓰기 어려워서 나무를 더 벌채해야 할지도 모르 겠네요.
중근세 목재고갈을 극복한 사례가 영국입니다.
증가하는 인구에 따라 숲이 끊임없이 개간되고 대항해시대를 맞아서 선박건조를 위한 벌채로 숲이 거의 사라지게 되자 영국은 제철을 하기 위해서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 석탄에 눈을 돌리게 되고 석탄이 새로운 에너지자원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석탄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갱도가 깊어지고 자꾸 고이게 되는 지하수를 퍼 올리기 위한 펌프(증기기관)의 개발이 산업혁명과도 연결이 되죠
조선만 나무가 부족해진줄 아는데 중국이나 유럽같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임 온돌뿐만 아니라 인구증가 경제발전 등으로 숲들이 소멸해 감
대신 유럽의 경우 비가 꾸준히오는 기후라 민둥산을 면하고 아메리카 시베리아에서 목재수급, 석탄의 활용이 사라진 유럽 숲을 대체했지
석탄썻어요
@@flat-coatedretriever4033 연료용 목재를 거의 대체할 정도로 대량으로 쓰진 않음
박사님♥
최박사님 조곤조곤하게 얘기를 잘 해주셔서 돌땡이같은 내 뇌에 입력이 잘 됨
지금 농지도 경사지의 침식현상이 엄청납니다.
시골 밭에가보니 잔디덮인곳과 안덮인곳이
20년만에 30Cm정도 차이가 나네요.
온돌이 없어도 밥은 지어 먹었을 것이고
밥 짓는 김에 난방도 해결 하는 거라 오히려 나무 소비를 줄이는 시스템이 온돌인 거 같은데...
열을 오랬동안 보존할 수 있어서 효율도 좋고
한가지 팁! 일본에게 정복되었을 당시 나무를 많이 베었어요. 큰 함지도 만들로 나무로 그릇도 만들어 일본으로 가지고 가고 철길도 깔고, 집도 건축 ...등등
박정희 때부터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어요
밥할정도로 방 안따듯해집니다 그리고 여름엔 밥안해먹을건가요?
@@flat-coatedretriever4033 전혀 논리가 없고 그냥 트집을 위한 트집을 잡고있네.
최준영 박사님의 지식은 어디까지인지 궁금합니다 응원하ㅡ고요 기대합니다
정약전은 정약용 선생님의 둘째형이시지요.
동생이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경주 최부자 집안이
경주 형산강변에 제방을 쌓아서 상습 범람습지를 농지로 간척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함.
물론 계속 다른 농지를 사들여서 더 큰 부자가 된 것이고.
온돌이 없었더라도 나무로 불을 때우지 않았을까요?
온돌이 없었어도 땔깜 수요는 높았을에요. 땔깜 수요가 높으니까 더 효율적인 난방 방식을 찾았고 그래서 온돌이 보편화 된걸로 생각됩니다.
경남남해안 늑도기원전후 유적에 초기온돌인 쪽구들이 발견됩니다 .기원전에 한반도 남해안까지 보급되었다는 증거죠 .
국뽕
온돌이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인구밀도가 늘어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온돌도 한몫했지만, 인구가 늘어나서 숲이 없어졌다고도 얘기합니다.
○ 소빙하기 >>> 17~18세기
○ 온돌
>>> 17세기 궁에만
>>> 보편화는 18~19세기
2022년에도 최준영로드를따라...
0:34
이희경님 표정이 풍부하시네요~
온돌전에는 어떻게 난방을 했나요?
화로를 방에 들여 사용했을 것으로 봅니다.70년대까지도 농가에는 단열이 안 되 무쇠 화로가 있는 집이 상당수 있었습니다.무쇠 주물로 만든 화로입니다.무쇠라 다 삭아서 지금 없습니다.다만 구리로 만든 동화로는 지금도 전해져 골동품으로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산림법 제정이 일제 영향 아래 1908년에야 제정되는군요. 식목사업도 일제시대에 시작되고..
박정희 정권 때 조림사업도 한몫 했을것 같네요 --- 1960∼1979년의 20년간 조림면적은 약 3,110천ha로서 우리나라 산림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이어 1980~1989년에는 859천ha, 1990∼1997년에는 241천ha, 1998~2004년에는 147천ha를 식재하였다.
박정희의 업적이 얄미워서 그 나무들 다 배어버리고 중국에서 수입한 태양광판으로 뒤덮고 있는거죠.
@@davidjacobs8558 응가를 입으로 싸시네요
@@user-ot6jm6pi7z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추워서 나무 베서 연료로 쓴거지 온돌 때문이라고 하긴. 온돌이 다른 난방기관에 비해 나무를 많이 쓰게 한다는 근거가 없는데…
중국 등 많은 나라가 바닥에서 띄운 침대를 쓰며 난방을 별로 안했죠.
조선은 맨바닥 생활이라 한기가 심해서 난방이 장시간 필요했구요. 침대를 안쓴 이유가 궁금.
18세기에 온돌과 함께 산 헐벗은 기록이 있다잖아요
온돌 생각보다 나무 많이들어요 오후 6시 12시 새벽 5시정도 3번은 피워야합니다
중국은 난방매연 때문에 폐병걸려서 사람들 죽어간게 기록으로도 남아있죠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나간 조상님들이 고생좀 했죠.
최준영 박사님 처돌이가 여기 왔습니다!!
온돌방 산의 나무를 모두 태웠다
온돌...조상의 지혜 정점
온돌이 18세기 후반에 유행했다니.. 별로 안 되었네요.
온돌이 없어도 난방은 필요하고 취사용 땔감은 사계절 필요하다. 더구나 온돌은 취사를 겸하고 방을 작게하고 한가족이 모여자면 온돌이 없는 경우보다 효율이 높을 수 있다. 문제는 인구 증가와 화전이다. 이렇게 인류는 숲을 파괴했다. 중국의 화북대평원도 원래 코끼리가 놀던 숲이었고 유럽대평원도 원래 숲이었다.
온돌이 없었으면 우리도 없었다.
18세기 그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어려움만 나오는 국사책......
일본은 계급별로 집지을 나무의 양을 정해주었죠
그뿐만 아니라 일본 에도시대때부터 일정크기이하 나무는 못베었고 베어버린 나무 자리에 철저하게 묘목심어서 채워넣게했음
온돌 ㅠ
정약전선생은 정약용선생의 형님임니다
답은 원자력이지
잘만들어진 온돌방은 한번 불을 때고 3~4일간 난방이 유지되는 시스템입니다
구들장이 있는 온돌 난방 지식이 없는 말씀이시네요
조선의 민가 주변 산림이 황폐화된 것은 인구증가와 소빙하기 추위 때문이지 온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방식의 난방보다 더 적은 땔감을 필요로한 방식입니다
my favorite 유튜버 최준영 박사님.
오늘도 어김없이 국뽕 브레이커 실현중.
생각해보니 바깥에서 돌을 데우는게 실내에 직접 불을 피우는것보다 나무가 더 들겠네.
포장하면 되지만 굳이 에너지 더 소모해서 배달시키는거랑 별 차이없지
더 편할수록 에너지가 더 들거든ㅋ
DALE PARKER
/ 고조선 유적지 박살내고 지은 레고랜드는 관심도 없지?
조선은 망할수 밖에 없었지.....온돌 때문에 씨가 마른게 아니라 관리 시스템 자체가 부재했던거지.
5백년을 버틴 보기힘든 욍조임 한글.조선실록등 세계유산이 넘치는 왕조였음
어느 나라나 왕조는 망하고 없어지고 또 다른 왕조가 나타나거나 또 새로운 문명의 국가가 나타나는건 어느 세계나 다들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는 500백년입니다. 세계어느 왕조가 500년이란 역사를 가지고 있나요?
조선은 청나라때 이미 그로기 상태였죠. 야만적인 청나라와 왜나라 사이에서 민족성과 전통을 유지한것만으로 대단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온돌이 좋다라는 국뽕에 취했었네요 ...... 조상들의 기록이 엄존하는데 이런것은 역사학자들이 언급도 한적이 없어요
온돌로 인한 환경파괴 때문에 온돌 쓰레기면 현대문명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ㅋㅋ 좋은건 좋은거고 부작용이 있는거지
구조상 2층고충집울 못지음 작은땅에 경제유입 인구증가의 한계로 규모의 경제제약
@@flat-coatedretriever4033 세상 누구도 2층에 무거운 온돌을 놓으라고 강제하지 않음 2층 이상은 온돌 안쓰고 다른방법 쓰면 되는거고 1층에 온돌쓰는건 장점밖에 없음.
@@user-ri73bdis88h7 다른 방법? 핵융합 쓸까요?
@@flat-coatedretriever4033 그당시에 일본같이 2층이상 건물짓는 나라들은 핵융합 썼다고 망상중이구나 너는 그렇게 살아라
꼭 온돌을 집에 설치해야 했나? 그냥 화로를 쓰면 됐을 텐데 차라리 온돌 땔 나무로 벽을 두껍게 만드는데 썼으면 더 나았겠다. 화로를 쓰면 화재 위험이나 연기 때문에 호흡기에 안 좋은 단점이 있지만 열 효율은 화로가 더 낫고 땔나무 낭비도 적었을 텐데... 일본은 조선보다 따뜻해서 나무가 자라기 쉬운 환경이었죠. 게다가 겨울이 조선만큼 춥지 않으니 온돌이 필요없어서 난방에 땔나무를 많이 쓸 필요가 없었죠. 이게 오히려 나무를 보존할 가능성이 높았겠네요.
나무를 국가적으로 심자는 이야기도 없었던 조선.....
그냥 심자 심자 한다고 손쉽게 해결되는게 아니예요. 땔감을 대체할 연료를 개발 또는 발견했어야 하는거죠. 석탄이라든가..
그리고 설령 석탄이 있다고 해도 그 석탄을 어떻게 보급할건가요? 유통은요? 수레가 다닐 길도 잘 없어서 보부상이 내륙유통을 담당한 조선에서 과연 석탄이 잘 보급됐을지도 의문.. 그런 경제구조나 유통시스템까지 모조리 바뀌어야 문제가 해결되는거죠.
민둥산 문제는 1960년대까지도 계속됐습니다. 조선시대만의 문제가 아니예요. 일정기에는 대도시 몇몇만이 화석연료를 에너지원으로 썼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인구는 농촌에서 땔감을 에너지원으로 썼기 때문이죠. 해방후에도 여전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난방에너지가 석탄으로, 그리고 석탄에서 석유나 가스로 이환된건 197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그제서야 삼림벌채가 중단됐고 그 덕에 현 대한민국이 산림녹화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식목일을 위시한 나무심기운동을 박통때 진행시키긴 했지만, 나무심기운동이 산림녹화를 성공시켰나? 아니올시다죠. 결국 답은 경제발전과 산업화였던 것입니다. 그런 에너지혁명을 과연 조선에서? 조선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버거운 미션이었던거죠.
@@mseiksby4541 근대 같은시기에 일본은 나무베고 그자리에 묘목 심고 일정이하 어린나무는 못베게하는등 철저하게 산림관림를한
@@mseiksby4541 내가 못한건 그냥 내가 못난거라고 봐야지 남들이 다 잘하는 와중에 정신승리는 안하는게 좋습니다.
중간에 쫙쫙 찢는 소리 이제야 좀 줄였네
조선은 망할 수 밖에 없는 나라였군요
온돌은 민가에서 보급되었습니다
한옥도 집을 짓는 것도 전부다 민가에서 부터 발전을 했습니다. 왕과 궁궐을 짓는 대목수들이 지을 때 그것을 기록으로 암긴것이지 실제역사는 그것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또한 나무 는 주기적으로 베어서 사용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산림에서 나무가 전부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소나무는 왠만하면 베지않고 냄겨 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땅에 묻혀있던 씨앗들이 주기적으로 나무로 자랐고 사람은 계속 그 것을 취하지만 해마다 나무는 다시 자라났습니다.
산에 나무가 부족해져서 정조가 '소나무 베면 뒤진다' 라고 엄명을 내린 적도 있고, 기록들이 죄다 뒷받침해주는 18세기 19세기의 팩트인데 그걸 부정하려듬? 하물며 '붉은 산'이라는 단편소설 모름? 붉은 산이 왜 붉은 산인데? 나무가 하나도 없는 민둥산이 한반도의 일반적인 풍광이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등장인물이 죽으면서 고향 생각하면서 붉은산 드립을 쳤지
나무가 씨앗에서 1년동안 몇센치나 크는지 알기나 하남? ㅋㅋ
@@mseiksby4541 하멜표류기에 보면, 하멜일행이 남한산성에 쫒겨가서 살때, 남한산성에서 10마일 이상 나무하러 갔어야 했다고 적었죠.
남한산성처럼 인적드문 (그당시엔 드물었죠) 산에도 마무가 없었다는 소리죠.
국뽕도 참
나무가 벼냐?? 해마다 벌목해도 다시 자라나게?? 나무가 10m넘게 어른 나무로 자랄려면 몇년이 지나야 되는지 아냐??
박정희 대통령 이 세계유일하게 산림녹화 성공시킨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온돌문화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듣보잡 이야기는 첨입니다.
아줌마 진행 잘 하네
저 수백년 반복된 고질적 문제를 해결한 분이 박정희 대통령
온돌로 인한 숲의 파괴는 상상을 초월함. 이것 때문에 조선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국가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게 다 한반도가 너무 똥땅이라 그런거. 온돌 안 하면 얼어죽는 세상에 드문 쓰레기 땅이었으니.
북한이네
북조선과 이씨조선, 비교해 보면 똑같음. 북괴가 유감없이 한민족의 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거임.
남한이 겉보기에 정상국가 꼬락서니 겨우 하고 있는것도, 순전히 막강한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일뿐.
미군만 빠져나가면, 몇년 안가서 남한도 북조선 꼴 날것임.
지금 한국의 삼림녹화는
모두 박정희 덕택이다
박정희에 감사해라
박정희의 업적이 얄미워서 그 나무들 다 배어버리고 중국에서 수입한 태양광판으로 뒤덮고 있는거죠.
지겨운 다까끼 신봉자들~~~
@@kychan73 그 시대를 살아온 분들이 왜 신봉하는지? 그 이유를 애써 외면하는 ㅆ ㄹ ㄱ !
@@조규철-n5t 세뇌에서 깨어나라... 어렸을 때 학교에서 북한은 세뇌교육을 한다고 그랬는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환상에서 벗어나면 많은 것이 보인다.
박정희처럼 여대생 강간하다가 죽어서는 신으로 숭배받는 인생 정말 알찬 인생이지.
일본식민지 시대때 다 가져가서
벌거숭이산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더좋은나무가 다른식민지에 많은데
@@flat-coatedretriever4033 일본이 무슨 대영제국도 아니고 식민지가 넘친줄 아시네
@@user-ri73bdis88h7 아시아 대부분 식민지 엮음 대동아공영 필리핀 인도네시아 우림밀림지대 넘친 혹시 소나무가 최고 좋은 나무로 생각?
온돌 국뽕 부심이 깨져서 스트레스받는 사람 많은 듯
DALE PARKER / 네 다음 이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