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중국 국경선인 장성 남쪽의 유주8군에 대한 『한서』권28하「지리지」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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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เผยแพร่เมื่อ 22 ก.ย. 2024
  • 대군 18현은 현재의 대동(大同)시를 중심으로 서로 대(代)현과 상간(桑乾)강, 회인(怀仁)현, 동으로 양원현, 위주, 광창현, 남으로 항산(또는 상산) 일대의 지역이다. 또 『대청광여도』에는 산서성 대동[다통]시(후위 도읍지)에 요서(遼西)라는 지역 명칭도 붙이고 있다. 『대청광여도』에서 요서(遼西)라는 지명을 명기한 지역은 총 3곳으로 현재의 태행산맥 서쪽지역인 산서(山西)성 대동시, 태행산맥 동북쪽 끝자락의 남쪽 지역인 하북(河北)성 진황도시 노룡현(요서군) 동쪽 『대명여지도』가 명기한 현재의 천안시와 무녕현 사이지역인 우북평군에 요서(遼西)라는 지명을 명기하고, 태행산맥 동쪽이자 요녕성 대릉하 동쪽에 요서(遼西)라는 지명을 명기하고 있다. A.D.55년 『삼국사』권15 「고구리본기」 제3 【태조대왕】 "3년 봄2월 요서10성을 쌓아 한병에 대비"한 바 있다.
    또 『대명여지도』에 '장안(長安)'령이 『대청광여도』에는 '장안(長安)'봉이 현재의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에 즉 『서한군국도』와 『서진군국도』, 『우적도』, 『화이도』 등 6종 고지도를 대차대조하면 상곡(上谷)군 15현 지역에 표기 되어 있으며 『삼국사』 권14 「고구리본기」 제2 【모본왕】 2년조(A.D. 49년 ) "장수를 시켜 북평(군,하북성 천안시 하관영진[샤관잉젠, 夏官营镇]), 어양(군, 하북성 북경시 계주구[지저우구, 蓟州区), 상곡(군, 하북성 장가구시 선화현[쉬안화현, 宣化县]), 태원(부, 옛 조국[趙國]땅, 기주[冀州]의 치소, 산서성 태원[타이위안, 太原]시)을 습격했다." 중 한 곳이다. 이곳 장안(長安) 지명은 고구리의 후기 수도 중 한곳인 장안성(長安城)과 연결되는데 『삼국사』 권제46 「열전」 제6 【최치원전】 《상태사시중장》조에서의 "고리 백제 전성시 강병 100만, 남침(침범하다) 오월(강소,절강,복건,광동,광서), 북뇨(흔들다) 유연(산서,하북)제노(산동), 중국을 크게 좀 먹었다"는 기록과 두우(A.D.735~812)『통전』권186 「변방」2 【동이】하 《고구리》조에서 "고구리의 그 땅이 후한(A.D.25~220)때 방2000(둘레 831km)리, 위(A.D.220~265)때 남북이 좁아져 겨우 1000여(415.8km)리, 수(A.D.581.3.4~619.5.23)에 이르러 동서6000리(2494.8km)였다"는 기록과 부합한다.
    『대명여지도』에 따르면 우북평군 16현은 현재의 하북성 난하 중류 동쪽 지역 즉 하북성 천안시 인접한 동쪽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표기했다. 『우적도』와 『대청광여도』에 따르면 요서군 14현에 해당하는 노룡[루룽,卢龙]현은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갈석산 인접한 서북쪽에 있으며 『서한군국도』와『서진군국도』 등에 따르면 요서군에 인접한 동쪽에 요동군 18현이 있고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갈석산 북쪽과 동쪽인 무녕[푸닝,抚宁]현과 창려[창리,昌黎]현 동쪽에 해당한다. 또 장성의 끝자락인 산해관 서남쪽 북대하구[베이다이허구,北戴河区]가 현토군 3현에 해당한다. 또 『대청광여도』, 『대명여지도』, 『우적도』, 『화이도』, 『서진군국도』, 『서한군국도』 등 고지도 6종을 종합하면 하북성 당산시 난남[롼난,滦南]현과 조비전구[차오페이뎬구,曹妃甸区], 낙정[러딩, 樂停]현과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갈석산 남쪽인 창려[창리]현 일대가 낙랑군 25현에 해당한다.
    사마천(B.C.145~B.C.86), 『사기』 권5 「진본기」제5 【사기정의】 "《괄지지》에 이르길:「고죽 고성은 평주 노룡현 20리에 있고, 은(은상(殷商),B.C.1600~B.C.1046) 때 제후 죽국이다.」"
    사마천(B.C.145~B.C.86), 『사기』 권115 「조선열전」 제55 【사기正義】 "《괄지지》에 이르길 "고리 수도 평양성 본래 한 낙랑군 왕험성 또 옛날 이르길 조선 땅이다."
    반고(A.D.32~92), 『한서』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 【조선】 제65 원봉2년(B.C.109) "우거(위만의 손자)가 병(군사)을 일으켜 (왕)험에서 막았다."
    범엽(A.D.398~445),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동옥저】조에서 "평양은 곧 왕험성이다."
    이연수(李延壽,?~? 당(A.D.618~907)나라 사람, 『남사』의 저자), 『북사』 권38 「열전」 제26 "구인주가 말하길: "고리 땅 본래 고죽국, 주대에 기자를 봉하고, 한세 3군으로 나누고, 진(사마)씨 또한 요동을 통일했다."
    김부식(A.D.1075~1151)및 11명, 『삼국사』 권제17 「고구리본기」 제5 【동천왕】21년 2월조"평양은 근본이 선인 왕검의 터다. 또 이르길 왕의 수도 왕험이다."
    일연(一然) 전견명(A.D.1206.7.18~1289.7.26.),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고조선】 《왕검조선》조 "고리는 본래 고죽국 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한이 3군을 나누어 설치하니, 현토·낙랑·대방(북대방)이다. 『통전』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
    『염철론』 권제8 「벌공」 제45 "대부가 말하길 : 제(齊)환공(桓公)이 월(越:강소성 연운항 및 남쪽 지역)·연(燕:북경시), 산융(山戎: 하북성 탕산시 천서현 지역)을 정벌하고, 고죽(孤竹: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을 지우고, 영지(令支:하북성 당산시 천진시 지역)를 멸망시켰다. 조(趙) 무령왕은 구주를 넘어, 대곡(代谷:산서성 태원시 북쪽 대현 안문관)을 지나, 임호(林胡:하북성 북경시 인접 서쪽의 태행산맥 일대)·누번(樓煩: 산서성 태원시 인접 서쪽 뤄판현)을 침략하여 멸했다. 연(燕)은 동호(東胡:『대청광여도』에 따르면 산서성 태원 인접 북서쪽 산이 연경산(燕京山:연의 수도가 있는 산이란 뜻)이며 하북성 장가구(張家口)시 회안현(怀安县) 일대가 현재 북경시 지역으로 이전하기 전의 연(燕)으로 기록하고 있다.)를 습격하여, 1000리 땅을 허물고, 요동(난하 건너 하북성 탕산시 천안시 지역)을 건너 조선(朝鮮: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주가 기자를 조선에 봉한 지역)을 공격했다."
    사마천(B.C.145~B.C.86) 『사기』 「화식열전」 “연(燕)은 발해(勃)와 갈석(碣) 사이 도회(都會)다. 남은 제(산동)조(산서,하북 남부지역)와 통하고 동북쪽 이(夷)와 접해 상곡에서 요동에 이른다.
    반고의 『한서』 권28 하 「지리지」 제8하 "연(燕)땅은 미·기(尾·箕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천문가(天文家)가 천하(天下)를 하늘의 이십팔수(二十八宿)로 나눈 청룡 중 인방(寅方) 즉 전갈자리로 (한나라 수도 장안에서 2시 방향), 연의 땅이 나뉜 곳으로,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할 때(B.C.1048~1046), 소공을 연에 봉했고, 그 36세 즉 1080년 후에 6국이 함께 왕을 칭했으며, 동에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 있고, 서에 상곡, 대군, 안문이 있고, 남에 탁군지역을 얻어, 용성, 범양, 북신성, 고안, 탁현, 랑향, 신창, 발해의 안차에 이른다. 다 연이 나뉜 것이다. 낙랑 현토도 이에 속하지 않겠는가.”
    반고(A.D.32~92), 『한서』 권28 하 「지리지」 제8하 "계(薊), 남으로 제(濟)·조(趙) 와 통하고, 발·갈 사이의 큰 도회다. 사고왈 계현, 연(燕)의 수도다. 발, 발해(渤海:발해군, 하북성 창주[창저우]시 인접 서쪽)다. 갈, 갈석(碣石:갈석산,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인접 동남쪽)이다. 상곡(上谷: 현재의 태행산맥 서쪽 하북성 장가구[張家口 장자커우]시 지역에 해당)에서 요동(遼東)에 이르고, 땅은 넓고 사람이 드물며, 수시로 도적이 침범하고, 풍속이 조(趙:산서성 태원시 지역에 해당) 대(代:산서성 대동[다통]시 지역에 해당)와 같으며, 물고기, 소금, 대추, 밤이 넉넉하다. 북으로 오환(하북성 승덕[承德, 청더]시 지역에 해당)·부여(내몽골 자치구 남동부 적봉[赤峰,츠펑]시 지역에 해당)와 이웃하고, 오환, 본래 동호[북경시를 태행산맥과 인접한 서북쪽인 하북성 장가구시 지역]로, 선우 묵돌이 멸망한 곳인데, 남은 무리가 오환산(하북성 승덕[承德, 청더]시 지역에 해당)을 지켜, 의지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고, 가면 현토[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창리[昌黎]현 동북 즉 갈석산 동쪽지역]에서 1000리(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 적봉[赤峰,츠펑]시 지역)다. 동쪽으로 진번과 교역하여 이익을 얻는다. 현토·낙랑, 무제 때 설치되어, 다 조선·예맥·구리·만이(삼한)다."
    기록들에 따르면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는 고조선의 수도인 왕험성이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에서 동쪽으로 235km 떨어진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었고 또 고구리의 9번 옮긴 수도 중 한 곳이자 『삼국사』권20 「고구리본기」 제8 【영양왕】 23년 봄 정월조 【수양제 하소문】에서 "발(발해군. 현재의 하북성 창주[창저우]시 인접한 서쪽)갈(갈석산.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동남쪽, 장성(태행)산맥 남쪽, 산해관 서남쪽, 발해만 북쪽)사이" 지역에 동황성(東黃城)현(롼난 현 탕산 시 허베이 성)이 북경(北京)에서 188.9km 떨어져 있기 때문이며, 북한 붕괴시 장성(산해관에서 금주와 의주를 가르는 소릉하 북쪽으로 대릉하를 북쪽으로 돌아 광녕에서 꺽어지며 요하와 혼하를 지나 해주와 요양 심양 삼만 개원을 지나 꺽어 내려오며 무순을 지나 청하까지 즉 만주 지역에 중국과의 전쟁에서 방어 경계로 고구리가 설치하고, 고리가 이어 연결하여 강화한 고리 1000리 장성으로 북한 전역엔 장성이 없다.)과 한4군을 설치했다고 중국이 주장하는 북한지역을 흡수해서 동북공정을 완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고리-요 전쟁으로 불탄 구『삼국사』의 기록이 실전된 이후 고리(高麗) 조선(朝鮮)시대 유교 사대주의자들은 역대 중국 정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역사서까지 축소 기록했으나 남은 역사 기록들(25사, 김부식 등『삼국사』 일연 전견명의 『삼국유사』)과 고지도들(서한군국도, 서진군국도, 우적도, 화이도, 대명여지도, 대청광여도 등), 석비 기록들(국강상호태왕광개토왕릉비, 이타인묘지명 등)을 대차대조해서 쫓아가면 역사 기록들은 조선 땅 즉 고죽이자 요서이자 비여현이자 노룡현이었던 왕험을 되찾기 위해 요서회랑을 넘었고 세대를 거듭하며 뿌리를 내리며 하북성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고구리가 확장했음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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