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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노시스
South Korea
เข้าร่วมเมื่อ 4 ม.ค. 2021
성경과 신앙에 대한 바른이해!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20강) 안식일 제도의 실천 과정 알아보기
신명기에서 말하고 있는 예배, 오늘날의 예배 무엇이 문제인가? 이교의 예배임을 모르는 당신, 제대로 이해하고 예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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มุมมอง: 23
วีดีโอ
Lecture 20 on Biblical Humanities with Gildongmu. Process of practicing the Sabbath system
มุมมอง 217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What is true worship? Should it be worship? Aren't we practicing pagan worship? Correctly understand worship #Moses #Biblical Humanities #Sabbath system #Gospel #salvation #method of salvation #prophet #prophet #jesus #reinterpretation #worship #Sukkot #Passover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60강) 다윗, 다시보기(새로운 관점)(20241120)
มุมมอง 992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계약공동체(이스라엘의 발자취-사무엘기. 사무엘의 구상, 어떻게 전개되었는가?(5)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왜 다윗인가?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다윗을 새롭게 보다 #케노시스 #길동무 #강인태목사님 #성서인문학 #사무엘 #사무엘서 #케노시스계약공동체 #거룩한전쟁 #하나님 나라 #사울 #블레셋 #역사 #재해석 #영성 #기회 #하나님 #블레셋 #악 #하비루의길 #하나님 나라 #계약법 #구원 #전쟁근절 #영성 #하나님 경험 #선택 #선지자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방법 #다윗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61강) 다윗, 다시보기(새로운 관점)(20241120)
มุมมอง 462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계약공동체(이스라엘의 발자취-사무엘기. 사무엘의 구상, 어떻게 전개되었는가?(6)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왜 다윗인가?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다윗을 새롭게 보다 #케노시스 #길동무 #강인태목사님 #성서인문학 #사무엘 #사무엘서 #케노시스계약공동체 #거룩한전쟁 #하나님 나라 #사울 #블레셋 #역사 #재해석 #영성 #기회 #하나님 #블레셋 #악 #하비루의길 #하나님 나라 #계약법 #구원 #전쟁근절 #영성 #하나님 경험 #선택 #선지자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방법 #다윗
20241117주일오후예배(열왕기하 6장 24~33절)
มุมมอง 142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2024년 11월 17일 주일오후예배(오전예배 설교나눔) 성경 : 열왕기하 6장 24~33절 인도: 강인태 목사(길동무) th-cam.com/play/PLbeXFR1jR7k3s1mNP4L0GZHBdRZHhtR_S.html&si=j1YQwR4iyWO6PW6g #케노시스 #계약공동체 #길동무 #kenosis #말씀나눔 #성경해석 #바른이해 #바른믿음 #바른신앙
20241117주일오전예배(열왕기하 6장 24~33절)
มุมมอง 672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2024년 11월 17일 주일오전예배 성경 : 열왕기하 6장 24~33절 설교: 강인태 목사(길동무) th-cam.com/play/PLbeXFR1jR7k3s1mNP4L0GZHBdRZHhtR_S.html&si=j1YQwR4iyWO6PW6g #케노시스 #계약공동체 #길동무 #kenosis #말씀나눔 #성경해석 #바른이해 #바른믿음 #바른신앙
20241110주일오후예배(신명기 34장 9절)
มุมมอง 444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2024년 11월 10일 주일오후예배(오전예배 설교나눔) 성경 :신명기 34장 9절 인도: 강인태 목사(길동무) th-cam.com/play/PLbeXFR1jR7k3s1mNP4L0GZHBdRZHhtR_S.html&si=j1YQwR4iyWO6PW6g #케노시스 #계약공동체 #길동무 #kenosis #말씀나눔 #성경해석 #바른이해 #바른믿음 #바른신앙
20241110주일오전예배(신명기 34장 9절)
มุมมอง 547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2024년 11월 10일 주일오전예배 성경 :신명기 34장 9절 설교: 강인태 목사(길동무) th-cam.com/play/PLbeXFR1jR7k3s1mNP4L0GZHBdRZHhtR_S.html&si=j1YQwR4iyWO6PW6g #케노시스 #계약공동체 #길동무 #kenosis #말씀나눔 #성경해석 #바른이해 #바른믿음 #바른신앙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59강)왜 다윗인가?(완전히 새로운 관점)(20241113)
มุมมอง 18516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계약공동체(이스라엘의 발자취-사무엘기. 사무엘의 구상, 어떻게 전개되었는가?(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왜 다윗인가?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다윗을 새롭게 보다 #케노시스 #길동무 #강인태목사님 #성서인문학 #사무엘 #사무엘서 #케노시스계약공동체 #거룩한전쟁 #하나님 나라 #사울 #블레셋 #역사 #재해석 #영성 #기회 #하나님 #블레셋 #악 #하비루의길 #하나님 나라 #계약법 #구원 #전쟁근절 #영성 #하나님 경험 #선택 #선지자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방법 #요나단 #골리앗 #다윗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58강)사울, 반드시 다시 보아야 한다(20241113)
มุมมอง 18821 ชั่วโมงที่ผ่านมา
계약공동체(이스라엘의 발자취-사무엘기. 사무엘의 구상, 어떻게 전개되었는가?(3) 불순종과 왕권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제거하려는 왕으로만 알고 있던 사울. 이 강의를 통해 사울을 반드시 다시 보라.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사죄를 해야 한다 #케노시스 #길동무 #강인태목사님 #성서인문학 #사무엘 #사무엘서 #케노시스계약공동체 #거룩한전쟁 #하나님 나라 #사울 #블레셋 #역사 #재해석 #영성 #기회 #하나님 #거룩 #악 #하비루의길 #하나님 나라 #계약법 #구원 #전쟁근절 #영성 #하나님 경험 #심판 #선지자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방법 #요나단 #약탈 #아말렉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57강) 거룩한 정복전쟁-아말렉편(20241106)
มุมมอง 26214 วันที่ผ่านมา
계약공동체(이스라엘의 발자취-사무엘기. 사무엘의 구상, 어떻게 전개되었는가?(2) 기독교의 사랑을 오해하지 말라. 악이 설 자리가 없도록 적극적인 것이다. 약탈전쟁을 근절하고 거룩한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는 거룩한 정복전쟁을 들어보라. #케노시스 #길동무 #강인태목사님 #성서인문학 #사무엘 #사무엘서 #케노시스계약공동체 #거룩한전쟁 #하나님 나라 #사울 #블레셋 #역사 #재해석 #영성 #기회 #하나님 #거룩 #악 #하비루의길 #하나님 나라 #계약법 #구원 #전쟁근절 #영성 #하나님 경험 #심판 #선지자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방법 #요나단 #약탈 #아말렉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56강) 거룩한 정복전쟁-블레셋편(20241106)
มุมมอง 33314 วันที่ผ่านมา
계약공동체(이스라엘의 발자취-사무엘기. 사무엘의 구상, 어떻게 전개되었는가?(2) 기독교의 사랑을 오해하지 말라. 악이 설 자리가 없도록 적극적인 것이다. 약탈전쟁을 근절하고 거룩한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는 거룩한 정복전쟁을 들어보라. #케노시스 #길동무 #강인태목사님 #성서인문학 #사무엘 #사무엘서 #케노시스계약공동체 #거룩한전쟁 #하나님 나라 #사울 #블레셋 #역사 #재해석 #영성 #기회 #하나님 #거룩 #악 #하비루의길 #하나님 나라 #계약법 #구원 #전쟁근절 #영성 #하나님 경험 #심판 #선지자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방법 #요나단 #약탈
20241103주일오후예배(열왕기하 6장8~23절)
มุมมอง 12214 วันที่ผ่านมา
2024년 11월 3일 주일오후예배(오전예배 설교 나눔) 성경 : 열왕기하 6장 8~23절 인도: 강인태 목사(길동무) th-cam.com/play/PLbeXFR1jR7k3s1mNP4L0GZHBdRZHhtR_S.html&si=j1YQwR4iyWO6PW6g #케노시스 #계약공동체 #길동무 #kenosis #말씀나눔 #성경해석 #바른이해 #바른믿음 #바른신앙
20241103주일오전예배(왕하6장 8~23절)
มุมมอง 14214 วันที่ผ่านมา
2024년 11월 3일 주일오전예배 성경 :열왕기하 6장 8~23절 설교: 강인태 목사(길동무) th-cam.com/play/PLbeXFR1jR7k3s1mNP4L0GZHBdRZHhtR_S.html&si=j1YQwR4iyWO6PW6g #케노시스 #계약공동체 #길동무 #엘리사 #kenosis #말씀나눔 #성경해석 #바른이해 #바른믿음 #바른신앙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5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23(20241030)
มุมมอง 19221 วันที่ผ่านมา
2024년 10월 30일 길동무의 성서인문학 55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23(사무엘서03) th-cam.com/play/PLbeXFR1jR7k14SySkaOpaCZSa0V3sLYOO.html&si=5yHlpT2w1e2SwBi0 #케노시스 #길동무 #강인태목사님 #계약공동체 #하비루의길 #사무엘서 #계약법 #성서인문학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4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22(20241030)
มุมมอง 22621 วันที่ผ่านมา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4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22(20241030)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19강) 율법과 복음은 무슨 관계인가?
มุมมอง 27821 วันที่ผ่านมา
길동무와 함께 하는 성서인문학 19강) 율법과 복음은 무슨 관계인가?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abbath institution and the Gospel?
มุมมอง 6021 วันที่ผ่านมา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abbath institution and the Gospel?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3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21(20241023)
มุมมอง 200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3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21(20241023)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2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20(20241023)
มุมมอง 144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2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20(20241023)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1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19(20241016)
มุมมอง 203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1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19(20241016)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0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18(20241016)
มุมมอง 184หลายเดือนก่อน
길동무와 함께하는 성서인문학 50강) 계약공동체의 발자취18(20241016)
교회 가서 마음을 다해 찬양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주일 예배를 충실히 드렸다고 생각했는데 목사님 강의를 듣고 보니 예배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잘못되었군요. 이교, 우상종교에서 건물(성전)을 잘 지어 놓고 온갖 의식으로 드려졌던 제사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개념부터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저 자신에게도 궁금을 넘어 답답하기까지 합니다.
너무나도 말초적인 것으로만 해석했던 것이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어 성경을 새롭게 접하게 되어 져서 놀라울 뿐입니다
저도 우연이 유튜브에서 목사님을 뵙게 되어 하비루의 책을 주문하여 읽고 있는데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더 넓고 깊은 말씀으로 놀랍워하고 있습니다 다른 책들도 주문하였으나 조금 늦어진다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목사님을 알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요 건강하십시오
반갑습니다 제가 다 기쁩니다!!!
사울왕은 버림받은왕이여서 다 잘못됐고, 다윗은 새롭게 기름 부음받아서 다 옳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믿고 왔는데,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사실을 사무엘 다윗 이새만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해석들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때가 되면 왕으로 추대할텐데. 이방신을 믿는 왕들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이 되어가는 군요 !.ㅠㅠ 또한 왕의 비위를 맞추어서 거짓되게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봉신 제사장 있었다는 것도 충격입니다 !!! ㅠㅠ
Q> 다윗 이야기의 재해석이 기독교 신앙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다윗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에서 영웅적 모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다윗 이야기에 대한 재해석은 이러한 전통적인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부정적인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 영웅 중심적 신앙관에 대한 반성**: * 전통적인 다윗 이야기는 다윗을 완벽한 영웅으로 묘사하며, 그의 업적을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 그러나 강의에서는 다윗의 잔혹한 행위, 권력욕, 정치적 야망 등을 드러내며 그를 입체적인 인물로 재해석합니다. * 특히 블레셋 망명과 소수민족 마을 약탈 사건은 다윗의 도덕적 결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이러한 재해석은 기독교 신앙에서 영웅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반성하게 합니다. * 완벽한 영웅을 추구하기보다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2. 신앙의 실천적 측면 강조**: * 강의에서 다윗이 제사장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신앙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 이는 신앙이 단순히 믿음이나 의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 다윗 이야기의 재해석은 기독교인들에게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 즉, 참된 신앙은 세상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3. 성경 해석의 다양성 인정**: * 다윗 이야기에 대한 재해석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전통적인 해석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고 질문하며 시대적 맥락에 맞는 해석을 추구해야 합니다. * 성경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살아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동적인 책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4. 성경에 대한 비판적 사고 능력 강조**: * 강의에서 다윗 이야기를 동화처럼 읽지 말고, 사실에 입각하여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맹목적인 믿음이나 교리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성경의 메시지를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성숙한 신앙, 즉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을 요구합니다. 다윗 이야기의 재해석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 **우상화된 영웅 이미지를 벗겨내고, 인간적인 연약함을 가진 다윗의 모습을 통해 참된 신앙의 의미를 되묻습니다.** * **또한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해석하며,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다윗 이야기의 재해석은 기독교 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현대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의 역할과 사명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
Q> 다윗 서사의 역사적 정확성과 신화적 요소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다윗 서사의 역사적 정확성과 신화적 요소의 비중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는 다윗 이야기의 역사적 측면보다는 신화적 요소와 그 해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윗의 부정적인 면모를 부각하며 기존의 영웅적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블레셋 망명: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망명한 사건은 역사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강의에서는 망명 과정에서 드러난 다윗의 잔혹성과 정치적 야망을 강조하며 이를 신앙적으로 비판합니다. 소수민족 마을 약탈: 다윗의 소수민족 마을 약탈은 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그의 영웅적 이미지와 상반됩니다. 헤브론 장로 매수: 다윗은 헤브론 장로들을 매수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는 그가 권력을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다윗이 단순한 영웅이 아닌,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다윗이 신앙을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강의에서 다윗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안에 담긴 신화적 요소와 해석에 주목합니다. 다윗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신앙과 관련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화적 서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Q. 다윗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핵심적 사건들은 무엇일까?🤔
다윗은 성경에서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묘사되지만, 다윗에게는 다른 면모 또한 존재합니다. 다윗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핵심적 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블레셋으로의 망명: 다윗은 사울의 정적이 되어 도피 생활을 하던 중 블레셋으로 망명을 시도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피가 아닌 정치적인 망명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최대 적국이었던 블레셋의 힘을 빌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1차 망명 시도는 블레셋 왕 아기스의 참모들의 반대로 실패했지만, 이후 다윗은 2차 시도에서 망명에 성공합니다. ● 소수민족 마을 약탈: 블레셋 망명 후 다윗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다윗은 이스라엘 남부의 소수민족 마을을 습격하여 잔혹한 약탈을 자행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후, 이를 아기스에게 가져가 이스라엘 지역을 약탈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합니다. 이러한 잔인한 행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묘사되는 다윗의 이미지와 상반됩니다. ● 헤브론 장로 매수: 블레셋의 이스라엘 총공세를 예상한 다윗은 사울 사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유다 지파의 수도인 헤브론의 장로들을 매수합니다. 그는 약탈한 재물 중 일부를 헤브론 장로들에게 뇌물로 제공하며 정치적 지지를 확보합니다. 이는 다윗이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 신앙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종교적 권위를 이용합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고, 제사장들을 통해 이를 선전합니다. 이는 다윗이 신앙을 진정으로 따르기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어떻게 사울과 대립했고, 이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Q> 다윗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을까?
다윗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단순히 믿음이나 외모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용기와 정의로움, 그리고 문제 해결 능력을 통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지 않을까요? 1. 다윗은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골리앗이 힘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하나님을 모독할 때, 다윗은 물매라는 무기를 들고 맞섰습니다. 그는 단순히 믿음만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곰과 사자와 싸우며 쌓아온 문제 해결 능력과 전략을 가지고 골리앗에게 도전했습니다. 2. 다윗은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졌습니다. 그는 힘없는 양들을 맹수로부터 지켜냈던 경험을 통해, 힘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고 약자를 위해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3.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불의와 폭력 앞에서 침묵하지 말고, 약자의 편에 서서 세상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훗날 이스라엘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다윗의 삶은 우리에게 믿음과 용기, 정의로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적인 욕망과 야심 또한 드러냅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어떤 사람? 그 시대 문제, 낮은 자들에 대해 가장 가슴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오늘 나는 무엇에 대해 가슴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가? 하나님 마음과 생각에 맞는 고민을 하고 있는가?
모세의 지팡이--양을 돌보던 지팡이 --모세가 이스라엘에 등장할 때 양치던 복장 그대로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 보신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을 맡기신다.
우리가 어찌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십계명은 계약법을 압축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죄, 내 죄를 모두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뒤집어 지는 성서인문학인데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곰곰히 따져보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제사를 잘못드려서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벌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고 하나님을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드는 말이다. 생각좀 해보자, 상식에 맞는 말인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화려하게 짖는 일이 마땅한 것인가?
우연히 유튜브에서 목사님 말씀을 듣다가 하도나 은혜로워서 하비루의 길이라는 책을 사서 정독을 하며 읽고 있는데 너무나도 유익하여 죄인의 길과 비움의 길 두권의 책도 주문하였습니다 목사님을 뵈니 광야에서 사셨던 세례요한이 연상됩니다 광야에서...
기독교의 구원론을 새롭게 해석한 말씀이 아닣 수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강한자들이 약자들의 침략해서 약탈하려고 하는자들을 절대 용서 할 수 없다! 이런 깊은 뜻의 의미를 깨닫게 되서 감동! 그동안 피상적으로 문자 그대로 믿음으로 생각한것이 넘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사울왕을 다시 알수 있는 계기가 되었네요.. 사울왕만큼 나라를 사랑했던, 왕궁도 짓지않은 검소한왕 , 후궁도 두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블레셋과싸워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왕, 아들을 왕위로 세습할 생각이 없었던 왕! 다만 사무엘이 요구한 약탈전쟁을 없앨 거룩한전쟁 실패가 그의 처절한 과오! 역시나 계약법정신(거룩한전쟁) 실천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게 되네요.
여기도 정신없는 이단이 하나있군
다윗과사울어떻게알고있었나요 새롭게해석돠는성경에서다윗과사울을만나보게요
네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말렉을 없이하라,내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라는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우리의 신앙을 돌이켜 본다. 교회에서 일대일 구원의 확신에 대한 질문에 무어라 말해야할찌 망설여지던 때가 있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여러 풀리지 않았던 고민들은 결국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였다. 단순히 죽은후 영혼구원이 아닌 인간이 살아가면서 불행하게하는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것이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해야 할일이라고 오래전 성경에서 말하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삼위일체 교리논쟁... 종교개혁...바울,루터, 경건주의/복음주의... 교회와 대비되는 단어는? 하나님과 계약맺은 공동체로써 이스라엘(계약공동체) 교회(새 계약공동체) 즉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한다.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아야 한다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말대로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니 정말 반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께만 다 떠넘셨는데 정말 다시 봐야겠습니다
수많은 교회들! 교회는 어떠한곳인지, 어떤 교회 여야하는가? 믿기만 하면 구원?다 잘 되기를 비는 기복적인 믿음과 잘못된 열심과 헌신을 가르치는곳인가?교회,구원,천국의 모순/허구/오류...헛지랄... 시원한 설명 👍
아브라함이 믿었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모든 사람이 복 받아 잘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 모든 사람이 복 받아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믿음으로 살아갈 때 가나안이 주어졌던 것이다. 가나안, 구원은 죽어서의 천국 만이 아니라 (천국은 완성된 가나안) 살아있는 현실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영원의 천국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케노시스 영성원에서 하는 성서인문학은 이런 해석이 맞고 다른 해석은 잘못되었다는 차원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설교와 신학이 과연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건지 , 하나님 믿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교회만의 진리인지, 세상 누가 들어도 타당하고 옳다고 믿어지는 우주적 진리인지, 자명한 이치와 절대 명분을 가지고 따져보았을 때 성경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고민하개 만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곰곰히 따져보았을 때 과연 이게 맞구나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 진리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이성도 하나님게서 허락하신 부분인데 이성과 신앙이 따로 따로여서는 안되고, 성경을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도 과연 옳구나라고 탄성을 지르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런 해석을 기초로 올바르고 뜨거운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우리나라도 아닌 서양의 어느 곳에 살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오늘날 내가 죄인이 되었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은 여기서 부터 교회와 성경에 거부감을 갖게 되지요 하지만 선악과를 계약법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애 세워나가는 법)으로 말한다면 나도 그 법을 잘 지키지 못하고 살기 때문데 아담때문이 아닌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기 인식으로부터 구원자이신 하나님, 예수님에 대해 더 간절한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게 진짜 어떤 의미인지 바르게 알고 싶어집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성경말씀,, 교회에서 듣던 설교와 다른 해석일지라고 마음과 생각을 열고 무엇이 자명한 것인지 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겠씁니다.
중세기는 성전 짓다 망한 시기입니다 오늘날 서양 교회들은 ?? 또 한국 교회는? 중세교회가 망한 것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게 아닌 지 두렵습니다. 속히 교회 성공주의 신학, 이원론적인 헬레니즘 신학에서 벗어나고, 이름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지 내용은 우상숭배와 다름없는 신앙생활을 청산해야 교회가 살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질투하시며, 대를 이어 저주를 내리고 또 대를 이어 복을 주시는가??? 이렇듯 성경에서는 이해 안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구절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는 의미를 잘 해석해 야 되겟지요 하나님의 질투-- 너희는 세상에서 미신, 우상, 그런 허깨비 같은데 빠져 허송세월하고 인생 탕진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 계약법을 똑바로 알고 똑바로 살아서 천대까지 복받고 행복하게 잘 살라는 하나님의 간곡한 부탁이며 명령입니다.
창세기를 누가, 언제, 왜 썼는지 기록배경을 알고 나니까 많은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사실 천지창조 과정을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하나님깨서 세사을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을 위함이라는 말씀에 감동과 충격을 받았씁니다.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존재하듯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천지창조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완전 180도 뒤엎는 말씀인데 또 들어보니 맞는 말씀이네요 인간을 위한 하나님,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가시는 하나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 무한감사와 감동이 밀려오고 나의 존재가치와 세상을 향한 책임감이 커집니다.
아담을 만드신 하나님, 사람 즉 나를 만드신 하나님 아담을 통해 에덴 동산을 다스리시던 하나님, 오늘날도 하나님 믿는 사람들 즉 나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사람은 사람을 믿지 못하지만 형편없는 우리를 믿어주시고 맡겨주시는 하나님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이며 감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선악과는 과일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 즉, 계약법을 말하는 것이며 선악과를 먹은 것은 계약법을 어긴 것이다. 그래서 아담 즉 사람은 법을 어긴 벌로써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 있는 처지로 전락했다. 구원은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죽어서 하늘 나라가는게 아니라 이 세상에 살 때 인권유린의 억압과 폭력이 없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신분, 지위, 빈부의 격차없이 골고루 잘사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되어있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많은 말씀들이 기독교 교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성경말씀에서 나온 것인지 똑바로 알아야 겠습니다. 현재 기독교인들은 교리와 하나님말씀인 성경을 같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기독교 교리형성 과정을 자세히 말씀해주셔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이원론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현실세계와 하나님나라를 이분화하였고 헤브라이즘은 일원론 사상에 기초해서 현실세계와 죽은 후의 저 세상을 구분하지 않고,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헬레니즘에 물든 기독교에서 빨리 벗어나 성경의 기독교, 헤브라이즘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셉의 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큰 꿈을 꾸며서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면 요셉처럼 성공한다는 개인 성공주의의 설교와는 너무나도 다른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형통한다는 것은 개인적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애굽 전체를 잘 살게 하려는 요셉의 큰 꿈과 절대 명분에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겠지요. 누구나 골고루 평등하게 잘사는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느낀다면 세상은 진작에 달라졌겠죠?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혼신을 다해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사울의 모습에 숙연해지네요 계약법의 정신, 약탈 전쟁을 근절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개 하는 건 지금 교회의 몫인데 어느 곳에서도 이런 설교는 없고 이런 성경해석도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땅에 거룩한 나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인데 기독교인들은 이 땅이 아니가 저 세상, 저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살고 있으니 세상은 전쟁과 폭력, 기근, 질병, 불평등, 기후위기에 직면해 있고 달라지는게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울이 실패할 걸 아셨을텐데 왜 사울을 왕으로 뽑으셨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의 전지, 전능을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잘못될걸 아시면서 사울을 뽑으셨다면 그건 사울을 뽑은 하나님의 잘못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부정적면이 아니라 긍정적면을 보시고 그렇게 되길 끝까지 믿어주시는 분이시다. 마치 부모가 자녁의 부족함이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는 것과 같다. 아니 부모는 인간이라서 그렇게까지 자녀룰 믿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선 우리를 나를 끝까지 신뢰하시고 기다려주신다.' 오늘 말씀 중 가장 나의 마음을 깊게 울린 말이다.
구원의 확신으로 영혼구원에 몰두하는 것이 이상적인 기독교인의 삶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이 어떻게 되던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며 하나님께 기도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할 하나님의 일을 대신할 자들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셨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을 좇는 사람일뿐.. 대한민국과 북한 이스라엘과 로마 미국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중국 일본 등의 "국가" 라는 인간속에서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육적 개념이 "죄에 팔려 있어 육에 속한 인간들의 육신의 생각"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그 근원을 알게 될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존재적으로 알게 될 것이고 그때서야 돌이키게 된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이스라엘과 로마의 충돌과 갈등 그리고 그 국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비극의 해결이 그분에겐 당면과제가 아니라 그저 깨닫지 못하는 세상에 속한 이들의 어리석인 전쟁으로 그 분에겐 큰 의미가 없었듯, 예수를 좇는 자들도 언젠간 예수님처럼 이 세상이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국가라는 개념의 정체를 알고 더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된답니다. 요한복음8장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로부터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은 너희의 말을 듣느니라 "내"가 세상에 속한 세상이라면 원리적으로 세상에 속한 말을 듣게 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 속해 있는 동안은 대한민국 이스라엘 같은 세상개념이 님의 인식과 의식을 사로잡고 놔주지 않을 것이고, 선악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은 독의 결과가 님속에서 일하며 세상에 속한 사람의 교훈인 도덕차원의 선과 악을 아는 일을 계속 시키는 죄의 일을 하게 할 것입니다. 그 땅에 속한 인식과 의식속에서 살고 있는게 죄랍니다 <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의 그 죄속에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경 몇 구절로 말씀하시니...구절신앙 헬레니즘에 갇힌 영육이원론 딱 그만큼
@@진상쌤 세상에 속한 이들이 자신의 수치인 육적 자신을 가리기 위하여 영과 육에 대한 말만 나오면 하는 공식적 말이 이원론이죠.. 사도바울의 이 말도 이원론이라 한다면 님의 말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 육의 생각이 사망이요 그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park8878 역시 구절. 숲을 보셔야...길동무의 저서를 추천합니다
@@진상쌤 님속에 들어가 님의 인식과 의식을 만드는 가르침과 교훈이 길동무님의 책속 가르침이라면, 내 속에 들어가 나의 인식과 의식을 창조하는 가르침과 교훈은 나의 성경에 대한 평생의 묵상입니다. 성경을 인용하는 이유는 성경의 권위에 빌붙어 나를 높이고자 함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내 옛 인식과 의식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의 새 안식과 새 의식으로 내 속에 나타나게 한 근원이기 때문이랍니다. 모든 사람의 인식과 의식은 태어나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자매, 친구, 멘토가 되는 선생님, 목사님 등 그리고 책을 비롯한 그 당시의 외부 사회환경인 미디어에 의해 형성되어 "나"를 형성한답니다. 현재 님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님의 모든 생각과 판단, 관점 그리고 마인드도 그렇게 형성되어 님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있고 그것이 님의 눈이 되어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것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것이 그 존재를 결정한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땅엣 것을 먹고 흡수하면 땅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되고, 위엣 것을 먹고 흡수하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된다는게 성경이 우리 흙에 속한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park8878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최고의 권위 아니 그 이상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수천년 전 그것도 외국 문화권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인간이 인간의 문화권속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것도 구전이라는 독특한 전승을 거쳐 나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시대 배경속에서 구전문학의 특징을 이해하고 영감을 가진 사람(왜냐하면 저자가 하나님이시므로)이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글이므로 당연히 의미는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구절파악만으로는 님처럼 오류에 빠지게 되고 게다가 믿음이라는 확신까지 더해지면 도그마가 되어 굳어지면...성경이 어떤 책인지 부터 파악해야합니다 역사와 영감을 빼놓고 해석할 수 없는 책입니다 그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신 자명한 이치와 상식에 기대어 다시 보셔야할 것 같습니다 물론 깨닫게 해달라는 진지한 기도와 함께요
설교자는 엘리사와 하나님의 관계를 통해 현대 기독교인들이 어떤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설교자는 엘리사와 하나님의 관계를 통해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세상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엘리사가 보여준 기도를 통한 문제 해결 방식과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는 모습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고 강조합니다. ●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를 통해 전쟁을 막았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알게 된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고, 이스라엘 왕에게 그들을 사마리아 성으로 인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의 말에 따라 아람 군대를 돌려보냈고, 그 결과 아람은 다시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 설교자는 엘리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했기 때문에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친 사건에서도 엘리사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했고, 그 결과 나아만 장군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기도를 통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 설교자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엘리사처럼 기도를 통해 세상의 문제, 특히 전쟁과 같은 심각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또한,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치유된 후 감사의 표시로 드린 재물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세상적인 욕심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반면,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에게 재물을 요구하여 나병에 걸리는 벌을 받았습니다. 설교자는 이를 통해 현대 기독교인들이 게하시처럼 세상적인 욕심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 설교자는 엘리사와 게하시를 대비시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세상적인 욕심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다했습니다. 반면 게하시는 세상적인 욕심에 눈이 멀어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설교자는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기도를 통해 세상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세상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이 영상은 한국어로 진행된 설교이며, 설교자는 성경의 왕하 6장 8절부터 23절까지를 본문으로 삼아 전쟁의 문제와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엘리사가 아람 왕의 군대를 눈멀게 해서 이스라엘을 구한 이야기를 예시로 들며,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를 도우셨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점과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역설하며, 현대 사회에서도 엘리사와 같은 믿음과 기도를 통해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설교는 엘리사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며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어나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한 행동은 단순히 나병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주고, 참된 믿음으로 이끄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엘리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습니다. 겸손: 나아만은 아람의 군대 장관으로,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1]. 하지만 엘리사는 그를 직접 맞이하는 대신 종인 게하시를 보내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전했습니다 [1, 2]. 이는 나만의 높은 지위와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종의 자세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습니다 [3]. 하나님의 능력: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말에 처음에는 화를 냈습니다. 그는 요단강보다 깨끗한 물이 많은 다메섹에도 있으니 굳이 요단강에서 몸을 씻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 그러나 그의 부하들의 설득으로 결국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담그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1]. 이는 인간의 생각과 논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엘리사는 이를 통해 나아만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으로 제한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자 했습니다. 참된 믿음: 나아만은 치료된 후 엘리사에게 감사하며 예물을 주려 했지만, 엘리사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1]. 엘리사는 나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나만에게 물질적인 보상보다 더 큰 가치, 즉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을 요구했습니다 [4]. 나아만은 엘리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져다 제단을 만들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 4]. 이는 나만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참된 믿음을 갖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엘리사의 행동은 단순히 나만의 나병을 치료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5]. 엘리사는 나아만을 통해 이스라엘에 참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리고, 전쟁을 종식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의 역할을 보여주었습니다 [5].
본인 생각과 주장(판단)이 얼마나 땅에 속한 말인지 모르시나 보네요... 전쟁에 거룩한 전쟁은 없습니다. 아마 어거스틴이 최초로 전쟁을 분류하여 "거룩한"이란 이름을 붙임으로 기독교가 국교화된 로마의 전쟁을 합리화한 걸로 아는데.... 살아 있을 때 이 세상의 악인과 악의 세력을 응징하지 않고 죽은 다음에 천당의 하나님의 심판에만 맡겨 놓으면 그게 뭐냐고 하시지만.... 성경이 그런 식이라면 살아 생전에 돈도 많이 벌고 자기 이름인 명예도 드높여 사람들의 존중과 부러움을 받는 높은 자리에 오름으로써 조용기 목사의 주장처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는 삶이 바람직한 삶이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찌질하게 살다가 죽은 다음에 천당가서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뭐냐는 말씀과 똑같습니다. 생존의식에 매몰돼 자기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우파든 세상의 불평등을 척결하려고 노력하는 좌파든 헤롯의 누룩에 취해 그 눈이 세상적이고 땅에 속해 육적이란 점에선 똑같답니다. 욥기35장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너희들의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너희들의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라
비폭력 주의자 이신가요? 여호와의 증인 이세요???
모세법과 유대교법의 차이점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놀랍고 놀랍습니다 복음서에 취중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신 말씀앞에서 고뇌하곤 하였는데 오늘에야 안식년 희년에 대한 답을 알았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십계명과 안식일 제도, 신약 복음과의 관계 해석 ● 십계명과 안식일 제도는 신약의 복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안식일 제도이며,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자를 완성하기 위해 오셨으며, 이는 곧 희년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누가복음에서 언급됩니다. ●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선언합니다. 즉, 십계명과 안식일 제도를 포함한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 구원은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핵심인 희년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십계명을 지켰는지 질문하며, 진정으로 율법을 지키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의미입니다. ● 사도행전에서는 초대 교회 신자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희년의 실천을 통해 구원받았음을 보여줍니다. ●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곧 희년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 신약의 복음은 구약의 율법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대속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왜곡이며,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멉니다. ● 희년의 실천을 통한 구원은 쉽지 않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르침입니다.😇
설교자가 강조하는 '계약법'의 의미와 현대 사회에서의 실현 가능성 설교자는 '계약법'의 의미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적극적인 실천으로 해석합니다. [1-3] 단순히 교회에 모여 예배하고 감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과 초막절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상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 4] 구체적으로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예시를 통해 '계약법'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유월절: 일주일 동안 가난한 자들의 양식인 무교병을 먹으며, 마지막 날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최고로 대접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무교병을 먹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과 빈곤의 문제를 잊지 말고 해결해야 할 과제임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2, 5] 초막절: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기억하고, 주택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2] 설교자는 '계약법'의 정신을 실현한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제시합니다. [3, 6] 요셉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7년 풍년 동안 양식을 비축하고, 흉년이 닥치자 백성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7] 백성들이 돈을 모두 써버리자 땅과 가축을 받고 양식을 주었고, 마지막에는 백성들의 몸까지 사들여 국가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3, 7] 이를 통해 요셉은 애굽의 모든 돈과 물자, 인력을 확보하여 토지와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정책을 실현했습니다. [3] 현대 사회에서 '계약법'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설교자는 요셉의 이야기가 꿈같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8, 9] 요셉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듯이, 우리도 기도를 통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9] 설교자는 한국어의 세계화를 예로 들며, 20년 전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현실로 이루어졌듯이 '계약법'의 실현 또한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8] 또한, 설교자는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들이 기독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기아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며, 진정한 '계약법'의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4] 결론적으로 설교자는 '계약법'의 실현이 단순한 감사와 예배를 넘어 세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적극적인 실천임을 강조하며, 현대 사회에서도 기도와 믿음을 통해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계약법'을 실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구원받고 목회를 하세요 예수님께서 살아계실때는 율법을 말씀하신것이 맞지요 십자가 사건이 이루고서는 신약을 완성 하신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 구약 신약 시대별로 나누세요
나눠야 하는 근거가 무엇이죠?
구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나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그 마음으로 간음을 한 자도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말 대로라면 천국 갈 사람이 없다. 갑자기 바울의 교리가 잘못 되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면 교리적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 준수에 실패하자 예언서에 보면 하나님이 율법을 마음. 심비에 새기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신약복음 예수님의 죽음 부활 성령강림의 사건을 통해 이것이 성취되는걸 볼 수 있죠.예수를 믿는자 마음에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셔서 거룩한 자로 변화됩니다. 바울은 이를 마음의 할례라고 하죠..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까지 합니다. 공관복음서 최후 만찬때 하신 잔을 들고 세상을 흘리는 언약의 피라는 말씀, 자기 목슴을 대속제물로 주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보면 대속적 죽음임을 부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만..요한복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침례요한의 선포,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심이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주셨으니 혈통으로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 난 자들이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에거ㅣ 복음입니다. 죄의 수렁에 빠진 자가 스스로 나올 수 없기에 창조주 하나님이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게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서 믿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만큼 사랑하는 자로 거룩하게 변화된다는 것이 성경적 해석으로 봅니다. 예수가 새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항하여라.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고, 요한서신은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랫니 기독교는 예수님이 삶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봅니다.그리고 우리가 죄인일때 십자가에서 증명된 하나님 사랑을 성령을 통해 깨닫게 될 때 거듭나서 그 하나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데레사 수녀는 "거울처럼 하나님 사랑을 반사하는 밝은 빛이 되는 것이 우리의 존재이유이다"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각자 소유를 팔아서 모든 것을 통용하던 때는 믿는 사람들이 탄압받고 끌려가고 죽어가던 시대였죠. 재산을 축적할 의미보다는 곧 재림해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준비하던 종말의 시기였으니.. . 이것을 오늘날 행하라는 것은 예수님을 세 번 죽이는 행위죠. 당시에 예수님이 안오시는 바람에 제자들 가슴속에서 한 번 더 죽으셨으니까요. 복음은 죄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희소식을 전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을 오염시켜서는 안됩니다.